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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순례] 1. 중국 제일계단 마안산 계태사(戒台寺)

기자명 법보신문

계향〈戒香〉 그윽한 도량엔 천년 노송이 법향〈法香〉 전해

연재를 시작하며

순례를 떠났다.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황량한 서쪽 사막 끝 돈황까지. 그 길에서 조주, 임제 스님의 혼이 담긴 사리탑을 친견하고, 바위와 동굴에 새겨진 무수하게 많은 부처님들을 만났다.

사실 바람처럼 살다간 위대한 순례자 혜초 스님의 고행에 비한다면 이번 여정을 순례라 하는 것 자체가 불경에 가깝다. 동쪽 끝 신라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인도로, 배를 타고 낙타를 타고 또는 걸어서 가물거리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고원을 넘었던 혜초 스님의 삶은 목숨마저 바람결에 날려 보낸 순례의 극치였다. 자신의 오줌으로 타는 목을 적시며 황량한 사막을 건넜을 혜초 스님. 그것은 순례라기보다 깨달음을 향한 위대한 여정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굳이 순례라고 하는 것은 이번 여정 내내 혜국 스님의 덕화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90여 명의 불자들은 7박 8일 동안 혜국 스님의 뒤를 따라 백림사, 임제사, 소림사, 백마사를 참배하고 용문석굴, 맥적산 석굴, 병령사 석굴, 유림석굴, 명사산과 월아천, 돈황 막고굴을 차례로 순례했다.

짧은 일정 때문에 토막잠을 자도 순례는 늘 주마간산. 그럼에도 혜국 스님의 감로법문이 있었기에 발길 닿는 도량마다, 친견하는 부처님마다 찬란하게 빛나는 깨달음의 등불이 될 수 있었다. “겉모양에 치중하지 말고 절의 향기와 옛 스님들의 체취를 느껴보도록 하십시오.” 스님의 자애로운 당부로 몸과 눈이 바쁜 가운데서도 마음은 결코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이 되지는 않았다. 편집자


 
계단(戒壇)을 품은 계태사의 계대전. 장식없는 검은 바탕에 황금색으로 새겨진 간결한 편액이 이 전각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북경 하늘은 흐렸다. 황사의 계절도 아니건만 푸른 하늘은 볼 수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불과 2시간. 달라진 하늘의 빛과 공기 흐름이 이곳이 한국이 아닌 중국 땅임을 오감을 통해 전달했다. 한국은 누렇게 익은 벼이삭 위로 자지러지게 푸른 하늘이 정겨울 가을이다.
첫 순례지인 계태사(戒台寺)로 가기 전 북경공항 인근에서 점심을 먹었다. 울긋불긋 다양한 음식들에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독특한 음식의 향과 기름에 볶은 생소한 이국의 음식들이 입맛을 매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행이 점심을 먹는 동안 홀로 음식점 주변을 둘러봤다. 거리를 지나는 젊은이들의 쾌활한 웃음, 밝은 미소는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활력을 들려주는 것 같다. 넓은 놀이터에는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 곳에서 아코디언만큼 큰 주판알을 놓고 아이에게 계산법을 가르치고 있는 부모들이 점점이 눈에 띈다. 중국인들의 남다른 사업 수완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 3대 계단 중 가장 오래돼

버스를 타고 마안산(馬鞍山) 기슭의 계태사로 향했다. 말의 안장처럼 산의 평평한 곳에 자리 잡은 계태사는 2500년 전 붓다로부터 시작된 고결한 계(戒)의 향기가 면면히 이어지는 곳이다. 절강성 항주 소경사(昭慶寺), 복건성 개원사(開元寺)와 더불어 중국 3대 계단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곳이 가장 오래되고 유서도 깊다.

수나라 초, 창건 당시는 혜취사(慧聚寺)로 불렸다. 그러나 이곳에 계단(戒壇)이 설치된 이후 계단사(戒壇寺), 계대사(戒臺寺)로 더 유명세를 탔다. 원나라 말기 화재로 도량의 태반이 소실됐다가 명나라 때 중건되면서 만수선사(萬壽禪寺)로 개칭했고 청나라 강희제 때 다시 보수하면서 지금의 계태사로 불리게 됐다. 현재 남아있는 전각의 대부분은 청나라 때의 것들이라 한다.

이곳에 처음으로 계단(戒壇)을 세운 스님은 법균 스님이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 때 스님으로 이곳에 계단을 설치해 계를 설한 이후 중국 황하 이북의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비구계를 받고 붓다의 향기로 중국 대륙을 뒤덮었다. 비유하자면 우리의 통도사 금강계단이라고나 할까. 중국 계단의 본향이다.

법균 스님은 율사 스님들이 흔히 그렇듯 철저한 계율로 바늘 한 땀 들어갈 틈이 없는 원칙론자이면서도 드물게 민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스님이다. 향기로운 계행과 더불어 허공처럼 툭 터진 자비는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 하고, 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신이한 신통을 지녀 절은 항상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스님이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그 모습을 보기위해 생업을 포기한 민중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특히 법균 스님에게 계를 받으면 업장이 소멸되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학처럼 고고하고 달빛처럼 은은한 스님의 명성은 빛이 물을 뚫고 바닥을 비추듯, 멀리 적국인 송나라까지 퍼져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민중들은 법균 스님을 보현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했다니, 절로 존경의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요나라 도종 황제도 스님에게 숭록대부수사공(崇祿大夫守司空)이라는 벼슬을 수여하고 직접 쓴『대승삼취계본』을 전달하며 귀의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북경에서 대략 35km, 1시간 정도 버스를 달려 도착한 계태사는 전형적인 중국 절의 모습이지만 산에 자리 잡은 탓에 우리 산사에서 맛볼 수 있는 아늑하고 소담한 정취 또한 짙게 풍기고 있다.

만수계대선사(萬壽戒臺禪寺)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지나자 백옥의 커다란 사자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는 부처님의 세계니 모든 삿됨을 내려놓으라는 듯 부리부리한 눈이 제발을 저리게 한다. 옆으로 거대한 회화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계태사의 역사를 기록한 청나라 강희 황제의 비석이 고풍스럽다.

산문(山門)을 지나자 정갈한 공간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도량 가득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앞으로 유백색의 비석들이 말없이 도량을 지켜보며 유장한 세월의 흐름을 들려주고 있다. 붉은 색의 고색창연한 전각들과 어울려 말끔하면서도 장엄한 도량의 아름다움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웅장하지만 쓸쓸한 대웅전

 
용의 비늘 같은 껍질을 두른 채 자는 듯 누워 있는 와룡송.

포대화상을 미륵불로 모신 독특한 양식의 천왕문을 지나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양쪽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신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대웅전이 당당한 자태를 드러낸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은 비취색의 기와를 얹어 색다른 맛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아래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진 황금색 편액이 근엄하게 아래를 굽어본다.

청나라 강희 황제의 작품이다. ‘연계향림(蓮戒香林).’ 나무가 숲처럼 어우러진 이곳이 바로 연화세계라는 뜻일까. 왼편 끝에 낙관이나 도장을 찍지 않고 편액의 정중앙 위에 당당하게 옥새를 새긴 것은 황제였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대웅전 안은 옛 건물의 고풍스런 맛은 별로 없다. 옛 것을 고루한 것으로 치부하며 때려 부셨던 문화혁명의 광풍에 본래 건물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목조 건물의 백미인 화려한 포(包)가 없다. 전통의 단절로 인해 포를 조각할 기술자가 사라져 버린 중국의 현실이 안타깝다.

대웅전을 나서 계단을 오르자 문화혁명을 거치며 폐허로 변해버린 천불각 터가 쓸쓸하게 일행을 맞는다. 한때 1680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던 이곳은 계태사의 가장 큰 법당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다. 그러나 이념의 광풍을 비켜가지는 못했던 듯 싶다. 문화혁명의 상처는 이렇게 아직도 도량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천불각에서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자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다. 설화 속 신선들의 세계가 이러했을까. 동양화의 그림 속에서 보았던 기기묘묘한 소나무들이 신비스런 모습으로 일행을 반긴다.

계태오송(戒台五松)이다. 1300년 세월의 흐름에 온 몸이 백색으로 물들었지만 거대한 가지를 하늘로 활짝 펼친 채 당당히 서 있는 구룡송(九龍松), 홍수로 떠내려가는 탑을 품에 안아 보호했다는 포탑송(泡塔松), 용의 비늘 같은 껍질을 몸에 두르고 자는 듯 누워있는 와룡송(臥龍松), 나뭇가지가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활동송(活動松),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모습의 자재송(自在松). 유서 깊은 사찰에 겨우 한 그루 있을까 말까한 노송들이 1000년도 넘은 세월, 말없이 도량을 지키며 불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강희 황제의 편액 속 향림(香林)의 뜻을 조금 알 듯도 싶다. 천년의 시간과 천년의 공간을 넘어, 슬픔과 기쁨마저 뛰어넘어 노송들은 자재한 그 모습 그대로 앞으로도 우리에게 진한 법의 향내를 전할 것이다.

노송들의 침묵에 마음을 맑히며 걷자 잠시 후 청정한 계율의 산실 계대전(戒臺殿)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계단 보호를 위해 2층의 목조 구조로 조성된 이곳은 중국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법균 스님이 계단을 설치한 이후 수천수만의 스님들이 이곳에서 계를 받고 붓다의 깨달음을 향해 치열하게 정진했을 터이다. 업의 가장 강력한 끌림인 혈연마저도 단칼에 끊어 버리고 삭발염의한 채 뜨거운 연비를 받았을 수많은 스님들의 금강석 같은 마음이 태산과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선불장(選佛場). 부처를 뽑는 곳. 장식 없는 검은 바탕에 황금색 글로 새겨진 간결한 편액이 이곳의 의미를 담박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계단은 우윳빛 백옥으로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고 있다. 3층으로 쌓아올린 계단 위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각층의 계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지는 형태로 주변에 아름다운 연화 무늬를 새겼다. 층마다 석조감실을 설치해 113개의 불보살을 조각해 화려하기 이를 때 없다. 과거에는 계를 설할 삼사칠증(三師七證)을 위해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의자 10개가 있었다는데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됐든 1000년도 넘는 세월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계를 받고 치열하게 용맹정진 했으리라.

계대 위 황금색을 수놓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글귀를 읽기 위해 고개를 들자 수정진당(樹精進幢)이라는 편액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진의 깃발을 세우다.’ 계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정진이 시작된다는 뜻일까. 『보속고승전(補續高僧傳)』에 나온다는 원문의 뜻은 이렇다.

사리탑에 깃든 법균 스님의 숨결

 
선불장 안의 계단. 백옥으로 조성된 3층의 계단 위에는 본래 삼사칠증을 위한 침향목 의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두루 구제의 문을 열어 중생의 근기 따라 응하시되/하나의 달이 모든 물에 그림자를 드리우니 그 빛이 덮지 않은 곳이 없어라/각천의 구름이 대지에 감로의 비를 뿌리니/평등한 자비, 인연에 관계없이 두루 고통스런 곳 적셔주네/정진의 깃발 세워 불이 차가워지고 얼음이 뜨거워 질 만큼 정진하니/허공이 찬양하고 삼라만상이 설법을 듣는구나.”(開普濟門 應衆生器 一月衆水 光無不被 覺天之雲 大地甘雨 等慈無緣 均沾苦 樹精進幢 火寒冰熱 虛空讚揚 萬象廳設)

계대전을 나와 내려오는 길에 법균 스님의 사리탑을 친견했다. 탑 속에 깃든 스님의 숨결이 있었기에 계의 향기는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으리라. 산문을 나서려는데 문득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떠오른다. 자장율사에 의해 중국의 종남산 계맥이 해동으로 흘러 들어간지 1400여년. 생각건대 모든 면에서 이곳 계단보다는 우리의 통도사 금강계단이 훨씬 장엄하고 영화롭다.

만대까지 불법의 수레를 굴린 삼계의 주인/쌍림에 열반하신 뒤 몇 천 년이던가/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있으니/널리 중생의 예불 끊이지 않게 하리라(萬代轉輪三界主 雙林示寂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禮不休).

자장율사가 남긴 불탑게가 시나브로 가슴을 적시고 있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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