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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순례] 2. 조주 스님 향훈 깃든 백림선사

기자명 법보신문

平常心의 도량엔 ‘無’자 화두 ‘성성’

 
조주 스님의 사리와 바리때를 모셨던 탑은 원나라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이 화려하게 다시 세워졌다.

스님은 처음 은사를 따라 행각하다가 남전 스님 회하에 이르렀다. 은사 스님이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나서 조주 스님이 인사를 드렸는데 남전 스님은 그때 방장실에 누워 있다가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불쑥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瑞像)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하였고, 누워있는 여래는 보았습니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주인이 있는 사미입니다.”
“누가 너의 주인이냐?”
“정월이라 아직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건데 스님께서는 존체 만복하소서.”
남전 스님은 유나(維那)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에게 특별한 자리를 주도록 하라.”

두 사람의 대화는 물 흐르듯이 막힘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담박하다. 그러면서도 모조리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시절인연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조주록』은 조주종심(趙州從諗·778~897) 스님과 스승 남전보원(南泉普願·748~835) 스님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주 스님의 나이 겨우 10세 전후였다고 하니 놀라운 천재성이며 뛰어난 선기(禪氣)가 아닐 수 없다.

존경스럽지 않은 선사란 없다. 그럼에도 조주 스님에게 더욱 각별히 마음이 끌리는 것은 수행자로서 티끌 만한 흠결도 찾아 볼 수 없는 고귀한 삶 때문이다. 빼어난 수행자로, 자애로운 스승으로, 그러면서도 청빈과 검소로 평생을 일관했던 선지식으로, 스님은 12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조주 스님을 엄한 스승보다는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스님을 사람들은 고불(古佛)이라는 별칭으로 상찬했다. 특히 종문(宗門)의 제일 화두인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는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로 지금도 많은 수행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 같이 친근했던 스승

『조주록』에 따르면 스님은 어린 시절 고향 인근의 호통원(扈通院)으로 동진 출가했다. 그러나 출가만으로는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을 다스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은사를 따라 여러 곳을 전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다 남전 스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깨달음의 법비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스님은 스승이 입적하기까지 40년간 정성을 다해 시봉했다. 요즘말로 보기 드문 효 상좌였던 셈이다.

남전 스님이 선지식이라고는 하나 육체가 소멸되지 않은 이상 인간적인 모습들이 훈습처럼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럼에도 40년을 변함없이 정성을 다해 모신 것을 보면 평상심이 삶 자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스님은 스승의 열반 이후에 60세가 넘은 노구(老軀)를 이끌고 20년간이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중국 천하를 만행했다.

“일곱 살 먹은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에게는 내가 물을 것이요. 100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가르치리라”
행각을 나서면서 스님이 세상에 던진 한마디다. 깨달음을 향한 결기라기보다 오히려 나이도, 지위도, 욕망도 모두 떠난, 텅 빈 허공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스님은 행각하면서 마조, 백장, 약산, 도오, 위산, 임제 스님 등 중국불교의 기라성 같은 선지식을 만났다. 그리고 깨달음의 벼리를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다.

관음전은 문화혁명 당시 파괴된 것을 근래에 다시 세웠지만 그 앞의 측백나무는 여전히 건재하다.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낳은 주인공이다.

조주 스님은 80세가 되어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인근 관음원에서 120세가 되도록 40년간이나 후학들에게 깨달음의 축복을 내렸다. 스님은 짧은 몇 마디 말로 깨달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보인 까닭에 임제 스님의 할(喝), 덕산 스님이 방(棒)과 비견하여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종문의 제일 화두인 무(無)자 화두를 비롯해 ‘뜰 앞의 잣나무’, ‘청주의 베옷’, ‘진주의 큰 무’ 등 번뇌와 망상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기라성 같은 화두들이 모두 조주 스님에게서 나왔다.

기록에 따르면 조주 스님은 20세 무렵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남전 스님에게 도를 물었던 스님은 ‘평상의 마음이 도’라는 말에 확연하게 깨달았으며 마음은 달처럼 환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도송을 읊조리며 이후로 번뇌 망상을 쉬었다.

“봄에는 꽃들이 피고/가을에는 밝은 달빛/여름에는 산들바람 불고/겨울에는 흰 눈/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이것이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그러나 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 40년 동안 한곳에서 스승을 모셨고 다시 20년 동안 두루 천하를 주유했다. 보임(保任)의 과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장구하고 치열했던 수행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스님은 당신의 법력으로 세상의 모든 번뇌가 한꺼번에 베어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화북성의 성도 석가장(石家壯)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른 아침 1시간 거리의 조현 조주시의 백림선사(栢林禪寺)로 향했다. 장군죽비와 같은 격외의 언어로 수많은 수행자들의 영혼을 흔들었던 선(禪)의 마술사 조주 스님의 향훈이 깃든 곳이다. 위대한 선지식을 친견하러 가는 길은 달콤한 감로(甘露)로 젖어 있었다. 가물어 먼지만이 가득하다던 도시에 어쩐 일인지 상서로운 안개가 자욱하다. 졸린 눈으로 바라 본 차창 밖 풍경은 뿌옇게 물기를 머금어 꿈결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아침의 상쾌한 기운이 도시에 조금씩 활력을 붙어 넣을 쯤 백림선사에 도착했다. 붉은 산문 옆으로 굴착기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가람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인 것 같다. 백림선사는 한나라 헌제 건안 연간(196~220)에 건립돼 처음에는 관음원(觀音院) 또는 동원(東院)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원나라 때이다.
“절 안에는 천년을 버텨온 조주탑이 있고/산문은 조주의 만리교를 마주 대하고 있다.”(寺藏眞際千秋塔 門對趙州萬里橋).

가람의 의미를 설명하는 주련에 눈을 맑히며 안으로 들어서자 푸른 측백나무들이 일행을 반긴다. 숲속에 들어온 듯 청량한 향기를 내뿜으며 하늘로 쭉쭉 솟은 나무들이 열병식을 하듯 양쪽으로 늘어서 길을 열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신기루처럼 아름다운 탑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조주 스님의 사리를 모신 조주탑이다. 특사대원조주고불진제광조국사탑(特賜大元趙州古佛眞際光祖國師塔).

조주 스님이 열반에 들자 문도들은 스님의 사리와 바리때 등을 수습해 고졸하게 모셨으나 원나라 때인 1330년, 스님의 덕화를 기리기 위해 다시 지금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벽돌을 조화롭게 쌓아올린 탑은 8면 7층에 높이는 33m. 탑은 마치 목탑처럼 처마와 기와지붕까지 사실적으로 살려냈으며 아름다운 포와 격자무늬의 문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특히 층층마다 용, 코끼리, 기린 등 상서로운 동물들을 조각하고 연꽃과 당초무늬로 정성을 더해 놀랍도록 아름답다. 이곳이 바로 뭇 수행자들의 혼을 흔들어 깨웠던 무(無)자 화두가 나온 문이며 ‘뜰 앞의 잣나무’라는 벼락이 ‘꽝’하고 내리쳤던 곳이다.

탑을 지나자 뒤편으로 관음전이 보인다. 옛 모습은 문화혁명의 광풍이 휩쓸어 가버리고 지금의 관음전은 근래에 세워진 것이라 그저 옛 모습을 짐작해 보는 정도다. 그러나 그 앞, 예사롭지 않은 측백나무에 눈이 번쩍 뜨인다. 몸 곳곳 허옇게 뼈대를 드러낸 채 쌓인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는 그 모습. 바로 조주 스님 당시 ‘뜰 앞의 잣나무’라는 화두를 낳게 한 그 주인공이다.

어느 날 학인이 와서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관음전 밖 나무를 보며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그러자 학인은 다시 물었다.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그러자 스님은 대답했다.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에 학인이 재차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그러자 조주 스님은 다시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뜰 앞의 잣나무’를 한문으로 하면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다. 중국에서 백수(柏樹)는 측백나무인데 옛 스님들이 백림선사에 직접 와보지 못한 관계로 잣나무로 오해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의미는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

복원된 도량엔 150명 상주

 
조주 스님의 향훈이 가득한 백림선사에는 스님의 자취를 찾아 온 수 많은 사람들의 향공양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관음전을 친견하고 긴 회랑을 따라 들어가자 뒤쪽으로 거대한 법당이 도량을 짓누르듯이 서 있다. 만불루(萬佛樓)이다. 1만 명이 동시에 법회를 볼 수 있는 규모라는데 놀랍도록 거대하다. 문화혁명 당시 조주탑과 몇 개의 비석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파괴됐다. 그럼에도 지금의 백림선사는 도량 곳곳 수많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상주 인원만 150여명. 방이 450개나 되는 요사, 강원과 연구소, 박물관 등이 차곡차곡 들어서 중국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도량이다. 그러나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상의 다리가 부러지자 시주를 마다하고 타다 남은 부지깽이를 묶어 대신했다는 조주 스님의 눈물겹도록 맑은 청빈을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조사의 관문인가? 조주의 무(無)자 공안 이것이야말로 선종의 제일 관문이다. 360개 뼈마디와 8만4000여 개 털구멍으로, 온 몸으로 의단을 일으켜 밤낮으로 ‘무(無)’자를 참구하라. 그러다 갑자기 뭉쳐졌던 의심덩어리가 대폭발을 일으키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관우 장군의 대도를 빼앗아 손에 넣은 것과 같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것과 같고, 생사의 기로에 섰을지라도 자유자재를 터득하여,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든지 마음대로 행하여도 해탈무애(解脫無碍)한 참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무(無)자 화두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무문혜개 스님은 이렇게 비장하게 전하고 있다. 일본사람들은 나라가 바다 속에 잠기더라도 『임제록』 한 권만 건지면 더할 것이 없다고 했다지만 우리에게는 아마도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가 아닐까 싶다.

측백나무 가득한 도량을 지나 산문을 쉬엄쉬엄 걸어 나왔다. 바쁜 일정에 조주석교의 화두를 낳았던 조주교를 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마시는 차 맛이 더욱 향기롭다.

김형규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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