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 시킴의 수행자들

기자명 법보신문

“1200일 무문관 수행해야 라마로 인정”

 
푸동 사원은 시킴에 세운 ‘까규파’의 첫 번째 사원으로, 18세기에 시킴의 4대왕 ‘쵸갈 귬드 남걀’(Chogyal Gurmed Namgyal)이 세웠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인데도 그 규모가 대단하다.

2시간 가까이 달리다 보니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노(老) 라마의 다비식을 보고 돌아왔던 바로 그 길이라는 사실을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가다보니 지난 번 그냥 지나쳤던 곳이 반복됐다. 차가 옆길로 들어서 막 오르막길로 향했다.

창밖으로 공양물을 이고지고 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법당의 부처님에게 가 있는 듯 가벼워 보였다. 언덕을 오르고 나니 길 아래 공터에는 천막을 쳐서 만든 저잣거리가 들어서 있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눈앞에 드러난 일주문은 예가 곧 청정법계의 도량이라고 강변하듯이 당당하게 우리를 맞았다. 바로 ‘푸동 사원’(Phodong Monastery)에 도착한 것이다.

린포체 향한 지극한 마음이 계율

“예전엔 송광사도 행사를 할 때는 절 앞에 장마당이 서곤했어요.”

큰 행사를 앞두고 일주문 옆에 가게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의 출가 본사인 송광사 아랫마을의 노 보살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교통도 발달하고 물건도 풍족했지만 궁핍했던 그 옛날 그 시절엔 큰절의 장마당과 행사는 근방 사람들에겐 생필품을 구입하고 외지 물건을 살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불과 30여년전만 하더라도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는 불교문화가 깊숙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푸동 사원은 시킴에 세운 ‘까규파’의 첫 번째 사원으로, 18세기에 시킴의 4대왕 ‘쵸갈 귬드 남걀’(Chogyal Gurmed Namgyal)이 조성했다. 당시는 까규파의 대스승인 제9세 까르마파가 재세했을 때이다. 중앙에 위치한 푸동 사원 건물에 그린 벽화는 아주 섬세하고 완벽하기로 이름 나 있다. 시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통하는 도량으로, 현재는 260여명의 라마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연중 가장 성대한 행사는 티베트 달력으로 10월 말께 봉행되는 기도(Puja) 법석이며 이 법석에서는 ‘까규파’ 전통의 가면 춤(Mask Dance)을 친견할 수 있다. 운 좋게도 우리 일행은 가면 춤을 볼 수 있었다.

차에서 하차했을 때 법당에서 들려오는 염불 소리와 법구의 소리를 들으니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느껴졌다. 법당 주변에는 많은 라마들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티베트 라마들을 본 것은 처음이다. 푸동 사원의 구조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법당을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양쪽 옆으로 요사채가 들어서 있었고 일주문 왼편에는 다른 주거 건물보다 큰 건물이 있었다. 법당 앞에는 마당이 있고 마당 건너편엔 누각이 있다. 라마들이 생활하는 요사채는 허물어져 가는 촌락의 그것처럼 볼품이 없었다.

법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라마들은 우리 일행을 보자 매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마들 중에는 노 라마의 다비식에서 보았던 라마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우리 일행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염불과 법구 소리가 끊이지 않는 법당으로 들어가니 덕킁 린포체께서도 라마들 옆에 앉아 정진에 동참하고 있었다. 30분가량 흐른 뒤 쉬는 시간이 되자 마당으로 나와 린포체께 인사를 올렸다.

“염불은 얼마나 오래하나요?”
궁금증이 일어 여쭈었다.
“매년 이맘때 칠일 간 주야로 염불을 한다네.”

칠일동안 잠을 자지 않고 염불을 한다는 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모든 라마들이 잠을 자지 않고 함께 염불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니, 순간 강원시절로 돌아가 성의 없이 지장기도와 신중기도를 했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부끄러웠다. 참회의 진언이 흘러나왔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점심은 드셨나요?”
시드니에서 온 ‘알버트’가 물었다.
“아니요.”
“그럼, 함께 드시러 가시죠.”

이미 정오를 훨씬 넘긴 시간인데 점심을 달라고 하기가 어중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알버트가 우리를 구제해 준 셈이다. 알버트는 눈짓을 하면서 일주문 밖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저잣거리의 천막식당에 들어가 쌀국수를 한 그릇씩 시켜 시장기를 때웠다. 절로 돌아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니 몇 안 되는 가게이기는 하나 가게 안이 제법 활발했고 잡화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30여년전 우리네 시골마을의 가게에서 팔던 그것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따다다.”
이상한 소리에 이끌려 그곳에 가보니 창문이 열린 오두막 같은 집에서 어린 동자들이 가게에서 샀는지 장난감 총으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몇 명이나 살아요?”
“세 명이요.”

허술한 침상에, 공간도 비좁은 방사에서 세 명이나 산단다. 왜 출가를 했으며 지금의 삶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동자승들이 행여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경내의 건물들을 돌아보고 앞마당에서 덕킁 린포체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러 라마들이 법의를 수한 채 법기를 들고 일주문 쪽으로 급하게 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걀찹 린포체(Gyaltsab Rinpoche)께서 오실 겁니다.”
궁금해 하는 나를 보자 옆에 있던 한 라마가 말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의 환영하는 모습은 매우 이채로웠다. 마치 국왕이라도 맞이하듯 커다란 악기까지 준비해 성대하게 걀찹 린포체를 영접할 태세다.

형편없는 시설에도 늘 ‘만족’

푸동사원의 아주 오래된 벽화.

걀챱 린포체의 정식 이름은 ‘고셔 걀챱 린포체’(Goshir Gyaltsab Rinpoche)이다. ‘고셔’의 의미는 ‘국사’(國師)라는 의미로, 처음 린포체가 되었을 때 명나라 황제로부터 국사 칭호를 받았다. ‘걀찹’은 ‘고귀하다’는 뜻이다. 그는 ‘파드마삼바바’의 스물다섯 제자 가운데 한명이었으며 시간이 흘러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제6세 까르마파’로부터 인가를 받아 현생은 ‘제12세’에 이른다. 이생에도 태어나기 전에 ‘제16세 까르마파’로부터 인가를 받았고 1959년 ‘16세 까르마파’ 존자와 함께 시킴으로 와 현재는 주로 남시킴에 있는 ‘라랑 사원’(Ralang Monastery)에 주석하고 계시다.

“왜 안 오실까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고 사진으로도 본적이 없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는 조급증이 일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데 일주문 밖 사람들은 평안한 얼굴로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20여분이 지나자 이윽고 차가 도착했고 풍악이 울리면서 걀린포체의 모습이 들어왔다. 곧장 법당 건물로 들어가시고 그 뒤를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모두가 걀 린포체를 친견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나와 ‘알버트’ 그리고, ‘제니’는 덕킁 린포체를 따라 법당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그 건물은 4층 건물로, 1층은 법당이며 2층에는 양편으로 큰 방이 두개 들어서 있었으며 중앙엔 공양을 준비하는 공양간과 식당이 있고, 3층과 4층은 누각 형식으로 돼 있었다.

“여기가 내 방일세.”
벽화가 잘 그려져 있었고 침상 하나에 조그마한 불단이 마련되어 있는 아주 작은 방사였다. ‘횡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덕킁 린포체’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성품이 그대로 배어 있는 듯 했다. 린포체의 방에서 잠깐 쉬다가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푸동 사원을 다시 마주했다. 300여년의 제법 기나긴 역사를 간직한 이 도량을 품은 산세를 둘러보고 싶었다. 마침 그곳엔 낯이 익은 이가 있었다. 노 라마의 장례식에서 아랫 마을을 구경시켜준 ‘카르쟝’이다. 삼촌 라마를 돕기 위해 와있는 그에게 안내를 부탁하니 흔쾌히 승낙했다. 함께 일주문을 빠져나와 산위로 향했다.

“저기는 ‘탁치’(Tskchi)라는 곳입니다.”
10여분 길을 오르고 나니 작은 암자처럼 아담한 건물이 보였다. 그곳은 우리의 ‘무문관’(문 밖을 나오지 않고 일정기간 수행을 하는 곳)과 같은 수행공간이었다. 그 뒤편으로 더 올라가니 오래된 스투파가 우리를 반겼고 스투파로 향하는 길엔 하얀색의 ‘타쵸’가 두 줄로 서서 바람에 펄럭이며 법을 설하고 있었다. 스투파 앞에 서니 ‘푸동 사원’의 산세가 그대로 드러났다. 양 옆으로 산줄기가 크게 둘러싸여 있었고 한 가운데에 절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틀림없는 독수리 형상이다. 독수리가 마치 두 날개를 쫙 펴서 머리를 감싸고 그 머리위에 주인을 올려놓은 듯했다.

공간 부족해 늘 마당서 공양

무문관 탁치는 하늘도 볼 수 없도록 지붕이 철옹성처럼 둘러쳐져 있다.

“안녕하세요?”
내려오는 길에 ‘탁치’에 들렀다. 그곳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한 라마가 ‘다과’를 내어 주었다.
“여기엔 몇 분이나 계신가요?
‘카르쟝’의 도움을 받아 라마에게 물었다.
“여기엔 가르치는 스승 3명, 수행하는 라마 7명, 공양이나 이것저것 도와주는 라마 2명이 있어요.”
“그럼, 수행 기간은 얼마나 되나요?”
“3년 3개월 3일(1200일 안팎)입니다. 모레가 수행의 마지막 날이라서 낮에 잠깐 짬을 내 행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출가자들은 출가 후 일정기간이 되면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무문관’에 들어가 3년 3개월 3일 동안 수행을 한다. 수행을 마치면 ‘람’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며 비로소 정식 수행자로 인정받게 된다고 한다.

“그만 찍어요.”
‘제니’가 저녁 공양을 하고 나서 그곳의 라마들이 마당에서 둥글게 둘러앉아 공양하는 것을 마구 찍고 있었다. 예의에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진 찍는 데만 열중하는 그녀를 말렸다. 많은 대중의 숫자에 비해 건물이 부족한 그곳엔 함께 공양할 공간도 없어 공양 때마다 마당에 둘러앉아 먹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곳의 라마들이 대견해 보였다.

“가세.”
절에는 대중들이 많아 우리가 머물 수 있는 방사가 없어 린포체께서 준비해 주신 집으로 향했다.
“내게 도움을 많이 받은 집이라서 편안하게 머물 수 있을 것이네.”

우리가 머문 집의 어르신은 누군가의 독살로 돌아가셨는데 린포체께선 그 집의 세 자녀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학비를 후원하시고 계셨다. 큰 아들은 출가를 했다가 환속을 해 현재 린포체의 도움으로 학교 선생을 하고 있단다. 덕킁 린포체는 그 집의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우리 일행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꼼꼼히 당부했다. 자신의 베풂에 의지해 살아가는 집인데도 신세를 져야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다시 당부의 말을 건네는 린포체의 깊은 자비심이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시드니 보안 스님 boansunim@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