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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순례] 5. 돌에 새긴 장한 신심, 용문석굴

측천무후 불연 깃든 석굴 예술의 정수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따 조성됐다는 봉선사동 대불. 거대한 크기와 완벽한 조화미로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낙양(洛陽)으로 향했다.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청량하게 흐르고, 두보와 이백, 백낙천의 예술혼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곳. 조조·유비·손권이 자웅을 겨루고, 꽃 중의 꽃 모란이 마을을 소담스럽게 물들이는 곳. 바로 낙양이다.


낙양은 중국 6대 고도(古都)의 하나다. 우리의 경주, 혹은 부여와 같은 의미다. 기원전 770년 주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동주, 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후량, 후당 등 9개 왕조가 나라를 열었던 화려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네 마음속 낙양은 서글픔으로 기억된다.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인데….”


성주풀이 노래 가락은 삶의 무상(無常)함을 애절한 가락으로 속절없이 풀어놓는다.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 시대를 풍미한 영웅호걸과 절세가인이 무수히 살았지만 결국은 죽어 땅에 묻힐 수밖에 없는 유한함에 대한 슬픔이 절절히 흐르고 있다.


이런 무상의 도리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터. 지금의 낙양은 떨어지는 해처럼 옛 영화를 뒤로한 채 작은 도시로 전락해 긴 낙조를 드리우고 있다. 그래서 성주풀이의 가락이 더욱 구슬프게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낙양은 대대로 불연(佛緣) 가득한 땅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호불 국가였고, 황제의 불심 또한 깊었다.

 

북위 시대 전국에 절이 3만, 스님이 200만이라는 호언도 이래서 가능했다. 중국 최초 사찰 백마사, 선종의 서막을 연 소림사, 돈황 막고굴, 대동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3대 석굴인 용문석굴(龍門石窟)이 이곳 낙양에 있다. 낙양이 비록 쇠락한 고도(古都)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의 발길이 아직까지 이어지는 것은 옛사람들이 빚어낸 장한 신심의 흔적들을 잊지 못해서다. 그 중에서도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용문석굴은 낙양의 불교예술이 가장 화려하게 개화한 불교유적의 백미(白眉)이다.


산을 통째로 파고 들어가며 조성

 

 

▲용문석굴의 전경. 무수히 많은 석굴들이 마치 벌집을 연상케 한다.

 


용문석굴은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미려(美麗)한 강가를 따라 쭉 이어져 있다. 이하(伊河)강이다. 바다처럼 넓은 중국의 여타 강들과 달리 넓지 않아 소담한 강은 물고기가 비칠 정도로 투명하다. 용처럼 몸을 비틀고 있는 것처럼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의 어귀에는 아치형의 거대한 돌문이 입을 벌리고 서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돌문의 머리에는 용문(龍門)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용문석굴로 가는 입구라는 뜻이다. 돌문을 지나자 강을 따라 시원한 바람이 청량하게 불고 있다. 덕분에 여행으로 조금씩 쌓인 눅진한 여독과 자잘한 번뇌들이 상쾌하게 씻겨 내려간다.


이렇게 한참을 싱그러운 바람 가득 안고 걷자 갑자기 거대한 석굴의 군락이 마치 땅에서 솟은 듯 일행의 눈앞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산의 한 면을 통째로 파고 들어가 무수한 불상과 보살들을 조각해 놓은 석굴들의 향연이 부서지는 빛 속에서 찬란하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석굴은 마치 거대한 벌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용문석굴은 북위 때부터 당 말까지 400년에 걸쳐 조성됐다. 1.5km에 이르는 엄청난 공간에 1352개의 석굴과 10만여 기의 불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곳은 쉽게 부서지는 중국의 다른 석굴과 달리 강한 청색의 단단한 석회암에 조성된 까닭에 사실적이고 세밀하다. 그러면서도 유려함을 잃지 않아 보는 이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인다. 돈황 막고굴이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서역의 특색을 반영했다면 용문석굴은 단아하면서도 고요한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석굴 하나하나는 거대한 침묵과 성스러움이 가득하다. 온화한 미소의 불상과 화려한 보살들, 천정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문양들은 평범한 바위산을 깨달음의 빛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북위의 대표작인 빈양중동 석굴의 석가여래. 선무제가 부황 효문제의 모습을 재현했다는데, 단아하고 자애로운 미소가 일품이다.

 


용문석굴의 초입인 잠계사동을 지나면 북위의 대표 석굴이 말쑥한 모습을 드러낸다. 24년간 연인원 80만이 동원돼 조성했다는 빈양3동(賓陽三洞)이다. 빈양3동은 북위 역대 황제들의 효심이 가득 담겨 있다. 특히 북위의 선무제(宣武帝)가 아버지 효문제(孝文帝)를 위해 조성했다는 빈양중동은 북위 미술의 걸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높이와 넓이, 진입의 깊이를 모두 11m로 같게 한 석굴 안에는 11분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정중앙에 온화한 표정의 본존불은 온화한 미소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문제가 아버지 효문제를 모델로 했다는데 우리의 불상을 보는 듯 모든 것이 너무나 친숙하다. 특히 엷은 미소와 복식, 대좌의 모습에 얼굴 생김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금동불상 모습 그대로다. 또 천장에 새겨진 연꽃의 화려함도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작은 빛이 석굴에 비치자 소름이 끼치도록 미려(美麗)한 불상이 차례로 미소를 짓는다. 목숨을 바쳐 바위에 불상을 조각했을 옛 석공들의 갸륵한 신심이 시나브로 가슴 속에 젖어드는 순간이다.


귀족이나 지방 관원, 혹은 민초들이 새겼을 작고 소담한 석굴들도 무수히 많다. 소박하고 조촐하지만 신심만큼은 황제 못지않아, 천년의 세월이 무색도록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긴 회랑 같은 계단을 따라 조용히 부처님을 참배하는 일행 앞에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불상이 주위를 압도하듯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그 유명한 봉선사동(奉先寺洞) 대불이다.


장대하면서도 화려한, 그러면서도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대불은 마치 석굴암 부처님을 친견했을 때의 느낌처럼 황홀 그 자체다. 17m의 엄청난 크기에 얼굴의 길이만 4m, 귀의 길이도 2m에 달하는데 그야말로 용문석굴을 대표하는 세계적 걸작이다.


장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을 1500년 전, 어떻게 30m 깊이의 암벽을 깎아내어 이렇게 유려한 불상을 조성할 수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웅장하면서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그러면서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온화한 그 미소는 보면 볼수록 참으로 불가사의한 느낌이다. 2500년 전 붓다의 자애로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비로자나불로 알려진 대불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했던 여성 황제 측천무후와 인연이 깊다. 설화에 따르면 어느 날 당 고종이 측천무후에게 보살의 아름다움을 지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기뻐하는 대신 슬픔에 가득한 얼굴로 고종을 바라본다. 그리고 아무리 아름다워도 백년이 지나면 썩어 한줌의 흙이 될 뿐이라는 장탄식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고종은 고민 끝에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모습을 남기겠다고 약속하고 신하들에게 측천무후의 모습을 담은 불상 조성을 명령했는데 이것이 바로 봉선사동 대불이다.


온화한 미소 속엔 깨달음의 빛

 

 

▲백낙천이 만년을 보낸 향산사. 지나친 화려함으로 백낙천의 맑은 정신세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설화가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측천무후가 대불 조성에 1년 동안 소요되는 화장품 비용을 직접 기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영 허언(虛言)은 아닌 듯싶다. 설화를 반추하며 대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후덕하고 인자한 여성의 모습이 조금씩 살갑게 일어난다.


중국 역사에 있어 측천무후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여성도 드물다. 권력을 한손에 움켜쥔 여인들도 많았지만 스스로 황제에 오른 이는 중국 역사에 있어 오로지 측천무후뿐이다.


그녀는 당태종의 후궁으로 황제가 죽자 관례에 따라 절로 출가했으나, 재위를 이은 태종의 9남 고종의 총애를 받아 다시 궁궐에 입성했다. 고종이 촌수로 어머니뻘인 측천무후를 후궁으로 맞아들인 것이다. 야심만만했던 그녀는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황후와 후궁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결국 황후에 올라 고종의 총애를 독차지 했다. 그리고 병약한 고종을 대신해서 전권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황제가 죽자 아들들을 번갈아 가며 황제를 시키고 다시 폐위시키거나 죽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690년 스스로 황제에 올라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된 것이다. 기록으로 본 측천무후의 삶은 인륜을 저버린 악녀라는 세간의 평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권문세가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나 능력위주로 관료들을 발탁해 훗날 당 현종의 ‘개원의 치’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을 보면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사관들이 지나치게 혹독한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측천무후는 황제에 오른 뒤 불교에 깊이 귀의해 수많은 불사에 참여했다. 고승들을 불러 법회를 열었고 포교에도 막대한 힘을 쏟았다. 낙양의 경산사와 백마사, 용문석굴의 봉선사동에 측천무후의 숨결이 고루 남아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정이지만 만약 측천무후의 본래 모습을 후대 사관들이 악의적으로 왜곡했다면, 인자하고 자비로운 봉선사동 대불은 이들에 대한 통렬한 복수가 될 터이다.


너무 많은 석굴들에 의해 감동의 울림이 조금씩 잦아들 무렵 강 맞은편의 향산(香山)에 올랐다. 이곳은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백낙천이 노년을 보냈던 향산사(香山寺)와 그의 묘 백원(白園)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패기만만했던 백낙천은 항주자사 시절, 고승 조과도림(741~824) 스님을 찾아가 당당하게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도림 스님이 말했다. “모든 악한 행위를 하지 말고 선한 일만을 받들어 행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백낙천이 따져 물었다. “그거야 세살 먹은 아이도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자 도림 스님이 잔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살 아이도 알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네.”


이후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 백낙천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이곳에 향산사를 중수하고 스스로를 향산거사라 칭하며 산에 깃들어 만년을 보냈다. 그러나 가파른 계단의 수고로움을 마다않고 오른 향산사는 지나친 화려함으로 이미 백낙천의 맑은 정신세계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나마 고졸한 무덤만이 그의 무욕(無慾)의 삶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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