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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순례] 6. 진흙과 볏짚으로 빚은 맥적산(麥積山) 석굴

기자명 법보신문

만개의 굴과 천개의 방은 하늘이 빚어낸 보궁인가

 

▲맥적산 13호굴의 삼존불. 1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은 자비롭고 인자한 상호가 미려하기 그지 없다.

 

 

서안(西安))을 떠나 천수(天水) 맥적산(麥積山)으로 향했다. 뿌연 황사가 뒤덮었던 대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양과 느낌을 조금씩 달리하기 시작한다. 붉은 흙빛은 차츰 엷어져 어느덧 푸르른 산과 협곡으로 재주를 부리고,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 위에는 차들이 차례차례 꼬리를 물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산과 계곡, 벌판의 흐름 속에 신기루처럼 가버린 세월도 함께 달리고 있었다. 천축에 가기 위해 장안을 떠나 실크로드를 향했던 눈 푸른 수행자 현장 스님의 숨결과 계를 받고 동쪽 끝 고향 해동을 향하는 진표율사의 살가운 발걸음이 스쳐가고, 화공의 농간으로 황제의 간택을 받지 못해 눈물을 뿌리며 흉노왕에게 시집가던 왕소군의 비애가 차창 밖으로 흔들거렸다.


길에 생명을 내맡긴 채 말과 낙타의 등에 비단과 도자기를 가득 싣고 서역과 중국을 오갔던 대상들의 꿈과 희망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대지의 풋풋함과 황량함이 번갈아 모습을 드러내고, 땅과 강이 앞서거나 뒤서기를 수백 번, 뿌연 먼지의 농도가 점차 엷어지면서 어느덧 하늘에서 잘게 부서진 물방이 비가 되어 촉촉이 대지를 적시기 시작한다.


실크로드의 관문 감숙성의 첫 번째 도시 천수(天水)다. ‘하늘의 물’이라는 뜻의 천수는 중국 전설상의 황제인 복희씨의 고향이며, 중국 최초 통일 국가 진(秦)의 역사가 시작됐던 곳이다. 특히 한(漢)이 동서(東西)를 잇는 비단길을 개척한 이후 장안과 서역을 오가는 중요한 거점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지금은 주변에서 생산되는 석탄과 철광을 이용한 공업도시로 변모했지만 넘치는 활력은 예전이나 변함이 없다.


이곳이 천수라 불리게 된 것은 한나라 무제 때부터다. 문헌에 따르면 무제 3년(기원전 114년), 북쪽의 한 호수에서 백룡(白龍)이 승천하자 이를 기념하여 무제가 천수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또 천수의 땅이 갈라져 붉은 빛이 솟아나 하늘의 번개와 뒤섞였는데, 이때 하늘에서 갈라진 땅으로 성스러운 물이 쏟아져 호수가 됨으로 사람들이 천수라고 불렀다는 조금은 예스러운 전설도 들린다.


보릿단을 쌓아 놓은 듯한 석굴

 

 

▲운무에 젖은 맥적산 전경. 굴과 굴을 잇는 계단식 다리들이 산 전체에 미로처럼 얽혀 있다.

 


맥적산은 천수 중심에서 4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갈수록 울창해지는 나무와 숲, 깊고 넓어지는 계곡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우뚝 솟은 붉은 바위산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곳이 바로 맥적산이다.


산의 주변과 정상부는 울창한 산림인 반면 중간 지점은 붉은 빛을 그대로 드러낸 바위산으로 점점이 뚫린 석굴과 거대한 불상, 굴과 굴을 잇는 계단식 다리들로 인해 마치 미로처럼 연결된 개미집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산은 마치 보릿단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산의 이름 맥적(麥積)은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조조, 유비, 손권이 서로 중국 대륙을 삼등분하며 자웅을 겨루던 시절, 산의 굴속에 군량미인 보리를 저장해 놓은 까닭에 맥적이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이곳의 석굴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운강석굴, 용문석굴, 돈황석굴과 함께 중국의 4대 석굴로 불린다. 석굴의 굴착과 불상 조성은 4세기부터 시작돼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오대, 송, 원, 명, 청대 등 10여개 왕조를 거치며 계속됐다. 지금은 비록 황량한 석굴만이 남아 있지만 서위 시절에는 300여명의 스님들이 주석하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맥적산석굴의 규모는 다른 석굴에 비해 작다. 그러나 미로처럼 연결된 194개의 굴실(窟室)과 감실(龕室)에는 진흙으로 빚은 소상(塑像) 3513구, 석상(石像) 3662구로 총 7200여구에 이르는 엄청난 불상이 남아있다. 또 본생도(本生圖)와 변상도(變相圖) 같은 벽화도 1600여개나 남아있는데 돈황 막고굴 다음으로 많은 양이다. 세월에 따른 석벽 탈락으로 상당 부분의 벽화가 사라져, 1200㎡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그럼에도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남아있는 불상들도 독특하다. 석굴의 불상들이 대부분 돌을 조각해 만든 석불이라면, 이곳의 불상은 복합적인 재료가 쓰인 채색니조불(彩色泥造佛)이다. 나무로 기본 틀을 만들고 그 위에 흙과 짚을 섞어 제작한 소조(塑造), 혹은 니조(泥造)불상인데, 표면에 하얀 횟가루를 바르고 다시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해 정교함과 화려함이 으뜸이다. 특히 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진흙을 이길 때 달걀흰자와 다양한 약재를 섞어 넣었다는데, 불상 조성에 들인 정성의 깊이가 놀랍다. 이곳을 점토 예술의 보고란 뜻의 동방조소진열관(東方雕塑陳列館)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맥적산석굴에 대한 기록이 담긴 중국 ‘태평광기(太平廣記)’는 “푸른 구름 어린 가파른 절벽 사이에 돌을 깎아 불상을 만들었다. 만개나 되는 감과 천개나 되는 방이 있는데 비록 사람의 힘으로 이루었다 하나 신의 솜씨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말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주차장에서 놀이공원의 코끼리 열차와 같은 미니버스를 타고 맥적산 입구에 도착, 머리가 젖혀지도록 올려다 본 산은 뿌연 안개에 덮여 신비로움을 더했다.


서위 시절엔 300여 스님 주석

 

 

▲맥적산 5호굴의 부처님. 화려한 채색이 일품이다.

 


운무(雲霧)에 젖어 하늘과 산의 경계가 모호한데 그 중앙에 거대한 대불이 허공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또 주변으로 벌집 같은 석굴과 가로지른 다리가 은하수를 가로지른 오작교 같다. 중원을 떠나, 혹은 서역을 떠나 수 천리를 걸어 실크로드에 접어들거나 중국 땅에 들어섰던 상인들은 맨 먼저 이곳의 부처님을 찾아 간절히 안녕을 빌었을 터이다.


석굴은 산의 서쪽과 동쪽에 밀집돼 있다. 734년 진주 지역의 대지진으로 산이 동서로 갈라졌는데 대체로 서쪽 석굴들의 연대가 오래됐다. 깎아지른 절벽에 석굴을 만든 까닭에 산 전체를 미로처럼 이어놓은 회랑 같은 계단식 다리 외에는 석굴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가파른 다리 계단을 위태롭게 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3호굴 동쪽 절벽에 조각된 거대한 삼존불(三尊佛) 입상(立像)이다. 1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조각한 것인데, 자비롭고 인자한 상호에 물결처럼 부드러운 옷깃의 선들이 마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 듯 미려(美麗)하다.


특히 불상은 돌산에 먼저 나무 기둥들을 박고 돌을 조각한 다음 진흙과 하얀 석회가루를 발라 표면을 다듬었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에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마냥 매끄럽고 투명하다. 그러나 오뚝하게 솟은 코와 얇고 짧은 입술, 풍만한 몸체에서 서역의 영향 또한 짙게 느껴진다.


이들 대불은 진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문제가 조성한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대업을 기념해, 엄청난 불사를 일으켰는데 당시 스님이 23만명, 절 3792개소, 불상 10만6580구를 조성했다고 한다. 문제는 또 맥적산의 정상에 사리탑을 세우고 정염사(淨念寺)란 사호를 내렸다.


석굴의 상당부분은 개방되지 않은채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특히 천불상이 있는 회랑 벽면의 불상 수백구는 훼손을 막기 위해 철로 된 그물망에 갇혀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석굴들은 하나같이 화려했다. 진흙으로 빚은 부처님은 유려했으며, 벽화의 아름다운 색감은 천년을 넘어 찬란하게 비상했다. 특히 동방의 비너스라고 불리는 44굴 부처님의 잔잔한 미소는 순백의 꽃처럼 영혼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계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가팔랐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석굴을 조성했던 지역의 실력자들이 벼슬이 더욱 가파르게 오르기를 바랐기 때문이라는데, 아마도 올라갈수록 작업 환경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석굴에서의 감동을 하염없이 안고 내려오는 길. 애틋한 전설 하나가 진득하게 발길을 붙잡는다. 을불(乙弗) 황후에 관한 전설이다. 16세에 서위 문제(文帝)의 황후가 된 그녀는 12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정작 장성한 자식은 한명에 불과했다. 서위는 몽골계 유목민족으로 당시 유연이 국경을 자주 침략하자, 유연을 달래기 위해 그곳 왕의 딸을 부득이 황후로 맞이했다. 그러나 유연에서 새로 온 황후는 을불 황후를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을불 황후에게 출가할 것을 명했고, 을불 황후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황후에서 쫓겨나 맥적산에서 머리를 깎고 비구니 스님이 돼야했다.


천년을 견뎌온 벽화의 고운 빛

 

 

▲천불동 가는 회랑 벽면의 불상들. 훼손을 막기 위해 둘러진 그물망에 갇혀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새로운 황후의 강권에 못 이겨 을불 황후에게 사약을 내린 것이다. 을불 황후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사약을 마시고 그 한 많았던 생을 마감하고 만다. 후에 그의 아들 무도왕 원술이 진주 자사가 되자, 가장 먼저 을불 황후를 위한 석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을불 황후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지역의 민초들이 하나 둘 함께 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바로 43호굴이다. 어머니를 잃은 아들의 슬픔과 나라의 힘없음을 한탄했던 백성들의 서러움이 세월을 거슬러 아름다운 눈물의 사리로 남은 것이다.


운무에 젖은 채 하늘로 서 있는 맥적산은 하나의 거대한 불상이었다. 무수하게 많은 석굴의 수만큼이나 구구절절했을 깊은 사연들. 절벽에 나무를 박아 그곳을 딛고, 또 한줄 밧줄에 의지해 죽음을 무릅쓰고 부처님을 새기고 벽화를 그렸을 옛 장인들의 불굴의 예술혼. 그러나 지금 산은 말이 없고 부처님은 그저 미소만 짓고 있다. 돌아보는 일행의 눈이 안개에 젖어 촉촉하기만 하다.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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