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기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 인욕바라밀
견디기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 인욕바라밀
  • 법보신문
  • 승인 2010.12.28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몸과 마음에 피해를 입어도
원망하는 마음 갖지 않아야


‘나’라는 잘못된 관념 떠나야
완전한 열반을 이룰 수 있어


부처님은 몸 요구 제석천에
주저함 없이 자기살 베어 줘

 

 

▲미얀마 스님들의 탁발 모습. 부처님 당시의 승가 모습을 가장 잘 보전하고 있다.

 


14. 관념을 떠난 열반(離相寂滅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렇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이 사람은 매우 경이로운 줄 알아야 한다.”


성문(聲聞)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법상(法相)에 집착합니다. 여기서 법상은 법의 모습, 혹은 진리 그 자체에 집착한다는 말인데 내가 진리를 잘 알고 있다. 혹은 무엇을 알고 있다. 그런 마음의 집착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유(有)에 집착함으로써 이해를 삼으며 모든 법이 본래 공적(空寂)하여 이를 설명하는 문자가 모두 방편으로, 임시로 세워진 것을 모르는 까닭에 홀연히 높고 깊은 차원의 경전의 말씀을 통해 어떤 번뇌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곧 그대로 부처라는 말을 듣게 되면 이를 이해하지 못해 오히려 놀라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근기가 높은 보살들은 이 이치를 듣고서 기쁘게 받아들여 마음에 어떤 두려움과 물러남이 없게 되나니, 그와 같은 일들은 참으로 드문 희유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경전을 공부할 때의 자세와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경전을 읽고 배우지만 경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전에서 말씀하신대로 우리 마음속의 잘못된 관념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불교를 배우고 경전을 읽는 목적이 번뇌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어떻게 버리고 없앨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은 가르침대로 나의 삶은 나의 삶대로 이렇게 괴리가 생기게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경전을 읽고 배워도 우리의 잘못된 관념이 전혀 변함이 없다면 경전을 읽고 배움과 관계없이 번뇌 망상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여래는 최고의 바라밀을 최고의 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최고의 바라밀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는 행하지 않으면 곧 그른 것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도 실천하면 곧 옳은 것입니다. 또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으면, 즉 너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라는 주관과 객관으로 나뉜 분별이 있으면 잘못된 것이고 마음에 능소가 없다면 이것은 옳은 일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위한 최고의 실천행(바라밀)은 실체가 아닌 방편이기 때문에 최고의 실천행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런 까닭에 또한 최고의 실천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을 여래는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였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온 몸을 마디마디 잘렸을 때, 나는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옛날 마디마디 사지가 잘렸을 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었다면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어도 그 고통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나’라고 하는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작은 불이익이나 불쾌함마저도 견딜 수 없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만약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 즉 사상(四相)이라고 하는 네 가지 그릇된 관념을 제거 할 수 있다면 고통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그냥 허공의 메아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의 우리는 참기 힘든 경계가 마음에 와서 닿게 되면 곧 화를 내고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자의 자세는 전혀 아닙니다.


만약 모욕과 같은 잘못된 경계가 마음에 와 닿아도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견뎌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거나 해침을 당해도 당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고통을 가하는 어떤 누군가의 실체가 있다는 관념도 가지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육체적으로 해를 당해도 전혀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인욕바라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하시다 초지(初地)에 이르러 인욕선인이셨을 때 가리왕(歌利王)이 신체를 칼과 같은 것으로 해를 입혔음에도 조금도 아프거나 괴롭다는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만약 아프다거나 괴롭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분노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리왕은 범어(梵語)로 번역하면 ‘극악무도한 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과거 부처님께서 수행하시다 왕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항상 십선(十善)을 닦아 백성들을 이익 되게 했고 백성들은 이런 왕의 공덕을 노래로 찬양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가리(歌利)’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가리왕이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여 인욕바라밀을 닦을 때 제석천이 백정으로 변신하여 왕의 몸을 주기를 구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리왕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몸의 살을 베어 제석천에게 주었고 그러면서도 티끌만한 분노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리왕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어느 것이든 모두 인욕바라밀의 이치에 닿아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부연하자면 인욕바라밀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을 뜻합니다. 누구나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을 인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참을 수 없는 참는 것은 어떤 상태였을 때 가능할까요. 소제목에서 밝힌 것처럼 이상적멸(離相寂滅)이 돼야 가능합니다.


잘못된 관념들이 완전히 부서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상적멸에서 상(相)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말합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을 말합니다. 이런 잘못된 관념을 떠나야 적멸이 구현됩니다.


나를 놓고 봅시다. 우리는 육체를 포함해서 흔히들 나라고 하는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그 뒤로 나는 절대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조합된, 가짜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수행을 통해 이런 점들을 체득된다고 하면 욕망은 절로 줄어들게 됩니다. 아무리 경전을 읽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잘못된 관념들이 깨어지지 않으면 적멸은 요원한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평생을 가짜로 조합된 육체의 노예로 살아야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수행자였는데 그때 자아가 있다는 관념이 없었고, 개아가 있다는 관념이 없었고, 중생이 있다는 관념이 없었고,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오백생 동안 인욕바라밀을 수행하셨습니다. 그 결과 네 가지의 잘못된 관념이 생기지 않게 됐습니다. 부처님께서 지난 과거의 수행을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모든 수행자들로 하여금 인욕바라밀을 성취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욕바라밀을 닦은 사람이 인욕을 실천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과오를 보지 않게 됩니다. 원수와 친밀한 사람을 함께 평등하게 여겨 옳고 그름이 없어야 합니다. 남에게 욕을 먹거나 피해를 당해도 기쁘게 생각하고 상대방을 더욱 공경해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인욕바라밀을 성취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모든 관념을 떠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에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형색(形色)에 집착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는 말은 전체 내용의 대의를 설명한 것이고,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고 한 것은 전체 대의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육진(六塵)의 경계에 따라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까닭에 망심(妄心)이 쌓여 한량없는 업이 생겨납니다. 그 결과 우리의 불성(佛性)이 덮여 가리게 됩니다.


이러면 아무리 많은 수행을 한다 해도 번뇌를 없애지 못하게 될 것이니, 궁극에는 해탈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형색(形色)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생각 생각에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모든 법이 공함을 알게 되고 결국 분별과 집착이 떨어져 나가 항상 정진하게 됨으로 일심(一心)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정명경’에서 일체의 지혜를 구하려면 구하는 때가 아닌 것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구하는 때가 아님이 없게 하라는 것을 항상 방일하지 말고 구하라는 뜻입니다. 또 ‘대반야경’은 보살마하살은 밤낮으로 정진하되, 반야바라밀다에 머물러 잠시도 놓치지 않도록 항상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계속〉

 

종광 스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