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스님의 죽음
H스님의 죽음
  • 법보신문
  • 승인 2011.01.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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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암에 의지처도 없었지만 아름답게 떠나

H스님은 40대 초반으로 늦깎이 비구 스님이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던 스님은 자신이 간암에 걸렸음을 알았고 수술을 위해 지난해 초 일산 동국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H스님은 얼마 후 대구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문중의 한 어른 스님이 대구로 내려와야 수술비를 주겠다고 했단다. H스님은 우연히 알게 돼 찾아온 가족들에게도 자신은 절집문중 사람이니까 병원비 걱정도 문병도 오지 말라고 했더란다.


하지만 대구에서 암수술을 받은 스님은 간병인도 없이 오랫동안 병실에 방치됐다. 설상가상으로 그 어른 스님은 갑자기 병원비마저 낼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 내막이야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 H스님이 감당해야 했던 깊은 절망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술 후 쉬기는커녕 수술비 마련을 위해 다시 부전이라도 살아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분노했다. 특히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한 H스님의 아버지는 “내가 너를 꼭 살리겠다”며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쓰러져 별세하고 말았다.


내가 H스님을 만난 것은 지난해 6월말 부친의 장례를 치른 직후였다. 여동생의 정성스런 간호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사들도 그리 오래 살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나는 아침저녁으로 스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희망을 얘기했다. 나 자신도 2007년과 2009년에 각각 큰 암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스님도 힘을 내시라고 했다. 혹 병실을 찾아갔을 때 스님이 잠들어 있으면 다시 들려 그 스님과 눈을 마주하고 그 스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한번은 내가 들어가니 H스님은 아픈 몸을 추스르고 앉아 내게 합장했다. 그러더니 “출가한 이후에 내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준 건 스님이 처음”이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히려 같은 출가자로서 내가 죄송하고 몸 둘 바를 몰랐다. 병세는 갈수록 악화됐다. H스님은 퇴원을 하고 싶어 했다. 병원에서도 선뜻 동의했다. 나는 밖에서 스님이 머물 수 있을 만한 곳을 여기저기 알아봤다. 그렇잖아도 내가 있던 토굴은 아픈 스님들께 빌려주고 있는 터였다.


8월초 병원을 떠난 H스님은 가을의 문턱인 9월에야 병원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천도재를 지내고 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왔다고 했다. 스님은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갔다. 그럼에도 스님은 끝까지 출가자의 위의를 잃지 않았으며, 짜증내는 일조차 없었다. 간혹 들어오는 돈도 여기저기 보시했다.


한번은 내가 제주도에 갈 일이 있어 병원을 나서려는데 여동생이 달려왔다. 오빠 스님이 손수 써서 내게 꼭 전하라고 했다며 봉투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대엽 스님께 드립니다’라는 반듯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순간 코끝이 찡했다. 연필 한 자루 쥐기도 힘든 H스님이 온힘을 쥐어짜 썼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월13일, 결국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나는 H스님에게 “스님께선 마지막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정말 훌륭한 수행자였습니다. 다음 생에는 더 일찍, 더 좋은 인연으로 출가해 수행자의 길을 걷기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렸다. H스님도 “다음 생에도 꼭 스님으로 살겠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마지막으로 스님을 위해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해드렸다. 그렇게 아름답던 한 스님은 떠나갔다.


새해가 시작됐다. 지난 1월2일 도봉산 광륜사에서 H스님의 49재가 열렸다. 바쁘더라도 이맘때면 으레 한해 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올해엔 그 스님이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다. 


대엽 스님 동국대병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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