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이라도 단 한 생각이라도 의심을 품지 말라(念念勿生疑).”(관음경)
‘누군가가 해주겠지…’ 이런 식으로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가져서는 진리는커녕 도토리 개밥도 안 된다. 하려면 한번 미쳐 보는 것이다. 앞뒤 좌우를 다 보다가는 정말 진리의 문도 열 수 없고 또 삶의 바다에도 뛰어들어갈 수 없다. 젖 달라고 결사적으로 우는 어린 아기에게 어머니는 젖을 준다는 이 사실을 특히 불교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요즈음의 우리나라 불교인들만큼 미적지근하고 또 눈치를 살피는 종교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눈치를 살피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의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하고 의심하는 이것도 일종은 ‘의(疑·vicikitsa)’라는 하나의 큰 번뇌인 것이다. 체험을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머뭇거리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게 되면 그 흩어진 틈 사이로 두려움이 들어오는 것이다.
옹달샘의 경우 물을 떠 마실 때는 그 바닥이 얕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짝 떠야 한다. 그러나 물을 더 많이 뜨려고 푹 뜨게 되면 오히려 바닥에 잠겼던 흙탕물이 일어 물을 먹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두뇌란 이 우주에 비해서 크기를 봐도 아주 작은 것이다. 이 작은 두뇌로 아무리 따지고 생각을 하여 머리를 굴리게 되면 거기 흙탕물만 일뿐이다. 번뇌의 흙탕물만이…. 그래서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나친 생각의 흙탕물 때문에 영감이 다 부서져 버린다는 소리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이론적인 탐구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칠 때는, 즉 지식이 넘칠 때는 이 지식이 오히려 화근이 된다. 그 다음은 무조건 가는 것이다. 막무가내로 말이다. 그러면 두려움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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