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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엔 모두 시인…포기해선 안 될 것은 광야 걷는 순례자 길

기자명 법보신문

“일어나라. 앉아라. 잠이 웬 말인가. 고뇌의 화살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자가 지금 웬 잠이 이리 깊은가. 일어나라. 앉아라. 평온을 얻기 위해서 오직 진리의 길만을 곧바로 가라. 너의 게으름을 알아차린 저 죽음의 왕이 다시는 너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다시는 너를 묶지 못하게 하라.” (숫타니파타)


어떤 화가가 천사를 그리기 위하여 모델을 물색하다가 한 소년을 찾아냈다. 소년의 눈은 영감에 차 있었고 얼굴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화가는 이 소년을 모델로 멋진 천사의 모습을 그렸다. 그후 40년이 지나서 이 화가는 다시 천사의 모습과 대치되는 악마를 그리기로 했다.


길에 나가 악마의 모델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는 궁리 끝에 감옥으로 달려갔다. 죄수들 속에 행여 악마의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 있는가 물색해보기 위해서였다. 화가는 마침내 악마의 모델에 적합한 죄수를 찾아냈다. 그의 두 눈은 무섭게 충혈돼 있었고 어두운 살기(殺氣)로 가득차 있었으며, 얼굴은 그렇게 흉측할 수가 없었다. 화가는 이 죄수를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한편으론 악마의 모델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젖었다. 그날 이후로 화가는 매일같이 감옥을 찾아가 이 죄수를 모델로 악마의 모습을 그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됐다. 화가는 몹시 기뻤다. 자신은 천사와 동시에 악마를 그려냈다는 자부심으로 아주 만족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악마의 모델이 된 죄수가 울고 있었다. 화가는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왜 울고 있는가?’ 그러나 악마의 모델은 계속 흐느끼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나먼 강물처럼, 그 망각의 강물처럼 그렇게 침묵이 흘러갔다.


그때 악마의 모델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40년 전에 나를 모델로 천사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은 또 나를 모델로 악마를 그렸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화가는 깜짝 놀랐다. ‘아니 지금 저 악마의 모델이 40년 전에 그 천사였다니, 그 순수한 소년이었다니….’


그러나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그 젊은 날에 우린 누구나 천사였다. 영감에 찬 시인이었다. 젊은 날의 샤레이드였다. 젊은 베르테르였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세파(世波)에 찢겨 이제 그 천사의 모습은, 그 구도자의 열정은 다 식어버렸다. 대신 여기 험악한 짐승의 모습만이, 소주에 찌든 이 외로운 악마의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고정관념의 투성이만이 아직도 지긋지긋하게 살아서 남아있을 뿐이다.

 

▲석지현 스님
그러나 그래도 포기해선 안 된다. 그 구도의 길을, 인도의 광야를 가던 그 새벽순례자의 길을 포기해선 안 된다. 이것만이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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