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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캬파 도량서 친견한 불탑

기자명 법보신문

파란 하늘 향한 스투파는 세세생생 부처님 땅 증명

 

▲도줄 초텐 사원의 스투파,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이끈다.

 

 

“조금 있다가 사캬파 도량에 간다고 합니다.”
성스러운 도량 ‘룸텍’에서의 맑은 느낌이 채 가시지도 않은 다음 날 아침, 순례 도반인 ‘제니’가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래요?”
“제가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 사캬파라서 그런지 꼭 그 도량에 가서 공양을 올리고 싶어요.”


‘사캬파’는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중 하나이며 11세기 ‘사캬’라는 지역에 세운 사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13세기 몽골의 힘에 의탁해 100년가량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통치하다가 몽골의 멸망과 함께 세력이 줄었다. 그러나 성립 초기 다섯 명의 고승들이 체계화시킨 수행법이 전승되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순례 일행이 참배한 도량은 시킴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캬파의 사찰’이다. 그 도량의 이름은 ‘사놀초쪽 센터’(Sa-Ngor-chotshog-Center)로 강톡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1년 산문을 열었다.


우리가 탄 차량은 숙소를 벗어나 북쪽 방향으로 10여분 가량 달렸다.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를 거니는 시킴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았다. 인도만큼이나 궁핍하고 처참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얼굴엔 힘겨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막 마을을 벗어났을 무렵 담이 높고 담 위에 철조망도 보이는 건물을 지나갔다. 교도소였다. 이곳 사람들의 삶 모두가 정직하고 맑을 것만 같았는데 교도소가 존재하다니, 풍광이 아름다운 좋은 산에 교도소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 겉보기에는 ‘교도소’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교도소를 지나 5분가량 달렸을까, 절의 이름이 쓰여 있는 일주문을 지나 도량 안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사캬파의 ‘사놀초쪽’이란 도량이다.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법당 건물과 방사가 몇 개 있을 뿐이고 도량 전체에서 아주 조용한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법당 건물은 밖에서 보기에는 단청이 단아하게 잘 정돈된 3층의 모습이었는데 들어가서 보니 내부는 2층 구조였다. 법당에 들어가니 이 도량 수행자들의 살아가는 법도가 느껴졌다. 넉넉하지는 않으나 정갈했고 부산스럽지 않은 느낌 그대로가 전이되어 내 마음을 정화한다.


11세기 사캬 지역 사찰서 유래

 

 

사놀초쪽 센터(Sa-Ngor-chotshog-Center)의 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부처님.

 


참배를 한 뒤 다과를 들고 다음 절로 향했다. 매번 절을 갈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절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캬파의 사찰은 처음인데 느낌이 다른 곳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사캬파 도량 다음에 우리가 참배한 절은 ‘도줄초텐’(Do Drul Chorten)이라 불리는 사원이다. ‘초텐’은 스투파, 즉 탑이라는 의미이다. 그 절에 있는 ‘도줄’이라는 탑은 1945년 티베트 ‘닝마파’의 수장이었던 ‘툴시린포체’(TrulShi Rinpoche)가 건립했다. 이 스투파는 시킴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이곳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귀의의 대상이다. 주변에는 108개의 ‘마니라코’(Mani-Lhakor 벽에 부착되어 있는 둥근 바퀴)가 조성돼 있어 순례자들은 탑 주변을 돌면서 염불을 하고 108개의 바퀴를 돌린다. 도량에는 두 분의 ‘파드마삼바바’께서 일체 중생의 고통을 자비로운 미소로 어루만지고 계셨다.


큰길가에 주차를 한 뒤 나무들이 줄지어 길을 만든 소박한 길을 걸었다. 이윽고 커다란 스투파가 봉안되어 있는 마당에 들어섰다.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겨우 스투파의 윗부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도착을 했을 땐 몇몇 사람들이 마니라코를 돌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도량의 특이한 점은 법당이 어디에 있는지 얼른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스투파만이 마당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킴의 불자들을 따라 마니라코를 돌리며 탑돌이에 동참하다 보니 마치 티베트 불자가 된 듯하다. 지극한 정성을 담아 세 바퀴를 돌았다.


‘소남’이 미리 버터등 3000개를 공양 할 수 있게 부탁을 해 탑돌이를 끝낸 뒤 등불 공양을 올리는 공간으로 향했다. 타고 있는 등불들 때문에 안쪽의 공기는 밖의 공기와 사뭇 달랐다. 등 공양간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이 우리에게 등에 직접 불을 켤 수 있도록 버터를 입힌 나뭇가지를 주었다. 우리 일행은 7명이었기에 한 명당 버터등 400개 가량을 담당했다. 기계로 찍어 만든 등이 아니어서 그런지 어떤 등은 불이 금방 붙었는데 어떤 등은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하나하나 불이 붙을 때마다 마음이 맑아지고 고개가 숙여졌다. 마치 108배를 할 때 혼란스럽게 마음이 변하는 것처럼 등 공양을 올리는 과정 역시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등 3000개 공양하며 마음 집중

 

 

버터등에 불을 켜는 순례자들. 3000개에 달하는 버터등에 불을 켜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하다.

 


“린포체님을 뵈러 갑시다.”
일행의 등공양이 끝나자 소남이 우리를 그곳에 주석하고 계시는 린포체께 인사를 올리자며 권한다. 어느 방에서 린포체 친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미 점심 공양시간이 되어 뵐 수 없다고 한다. 한참을 기다려서인지 실망이 더욱 컸다.


다시 도량 곳곳을 둘러보았다. 시내에 있어서 그런지 도량의 통로는 ‘미로’처럼 생겼다. 한 바퀴를 다 돌고난 뒤에야 입구와 출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미로 같은 좁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니 역시 ‘파드마삼바바’를 모신 법당에 이르렀는데 실내 수리를 하느라 문이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다. 창문으로 들여다 본 실내에는 비닐로 덥힌 파드마삼바바의 존상이 가운데 봉안돼 있었다.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은 탓인지 먼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 건물의 뒤편에는 불교용품을 파는 자그마한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 주위에서 순례자들의 눈길을 끈 광경은 라마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이었다. 커다란 이불과 옷가지를 빠는 장소는 3층으로 된 요사채 아래로 물길이 나있는 곳으로, 물길 주변에는 빨래를 하거나 씻기 좋게 시멘트로 두드러진 단이 조성돼 있었다.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는 어린 라마들의 얼굴에선 그들의 삶이나 생각들이 얼마나 단순하고 맑은가를 엿볼 수 있었다.


점심 공양은 절에서 나와 큰길가에 있는 제과점 겸 식당에서 들었다. 각양각색의 빵들이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이 우리네 제과점과 다를 바 없다. 공양 후 우리는 시내로 나갔다. 내일이면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인도의‘보드가야’로 떠나야 하기에 우리는 시킴의 특산품과 기념품, 보드가야에서 쓸만한 생필품들을 샀다.


인구에 비해 출가자가 많은 시킴이라서 그런지 길에선 붉은 빛 법의를 수한 라마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시드니에서 온 라마나 푸동 사원에서 보았던 어린 라마들도 가끔 눈에 띄어 눈인사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는 동안 길 중간에 있는 화단가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거리의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인도풍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색적이 풍경 중 하나는 인도인들이 운영하는 가게의 문에 고추와 레몬을 실에 꿰어 매달아 놓은 것이다. 문 위에 북어를 걸어놓은 우리네 풍습과 같은 것이리라.


덕킁린포체는 시킴을 떠나야 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저녁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해가 질 무렵 제법 근사해 보이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의 분위기는 태국의 우아한 저택을 닮았다. 설명을 들어보니 역시 태국인이 설계했다고 한다. 입구에 봉안한 하얀색 불상부터 벽에 그린 그림들이 시킴 속에 있는 동화나라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나는 너무나 신기해 여기저기 눈에 띄는 것들을 둘러보고서야 일행 속으로 향했다. 맛있는 공양이었으나 이젠 시킴과 헤어져야 하다니, 아쉽다.


“시드니에서 대접을 받았으니 여기서는 내가 대접을 해야지….”
공양을 마치고 식대를 계산 하려는 사람들을 말리면서 린포체께서 하신 말씀이다.
“맘에 드는 것을 하나씩 골라보시게.”


린포체께선 공양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우리들에게 거실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고르라고 하신다. 시킴의 전통 공예품들로, 순례 중 보았던 전통 불상과 티베트 불교에서 불법을 표현하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모양인‘팔길상’이었다. 모두 나무로 조각이 되어있었는데 선물을 주려고 미리 주문을 하셨던 것이다. 가르침을 설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공양을 받아야 할 린포체께서 이젠 선물까지 주시다니, 순례자들의 마음이 감사함으로 가득해진다.


“내일은 오전 10시께 출발합니다.”
일정을 전담하고 있는 소남은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일행은 숙소의 거실에 모여 예전처럼 차를 마시며 담화를 나누었다. 매일 설레임으로 맞이한 새로운 일정들이었지만 보드가야로 향하는 미지의 세계, 그것도 시간을 초월해 석가모니 부처님과 만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요동쳤다.


다음날 짐을 챙겨 예정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길을 나섰다. 시드니에서 간 순례자 5명과 린포체 그리고, 숙소 식구들은 차량 한 대에 짐을 싣고 두 대에 나누어 탔다. 강톡에 올 때 따라왔던 그 길인데 느낌 달랐다. 올 때는 밤이었기에 잘 몰랐었는데 밝은 낮에 보니 길 자체가 아름답다. 히말라야로부터 내려오는 파란 강줄기와 일광욕을 하고 있는 원숭이들, 보드가야로 향하는 라마들의 차량 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시킴의 사찰은 대부분 까규파 소속이었고 ‘까르마파 존자’가 시킴에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어서인지 존자를 따르는 불자들의 수가 많단다. 보드가야에서 해마다 행하는 ‘까규 몽람’(까규파의 신년 기원대법회)에 동참하려는 불자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까닭이다. 팔관재계의 형식을 띠는 이 법회에 참여하기 위해 수많은 차량들이 스님과 불자들을 태운 채 기차처럼 줄을 잇고 있다.


까르마파 존자 신도들도 많아

 

 

19시간 동안 달려 순례 일행을 보드가야로 태워다 준 버스.

 


3시간 넘게 달려‘실리구리’에 도착했다. 짐을 싣고 먼저 떠난 차량의 사람들이 이미 버스표를 구매했기에 일행은 인도 식당으로 가서 간단히 공양을 들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오후 4시 역에 도착했다. 오후 5시 버스라고 했는데 5시가 한참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그곳 사람들은 버스가 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미 적응이 돼서인지 표정들이 무덤덤하다. 나 역시 그들을 보면서 그냥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인도는 인구가 워낙 많은 나라인데 ‘실리구리’란 도시에도 사람이 많았다. 시킴에서 본 사람들을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두 봤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겨우 버스가 미안함도 없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도착했다. 큰 짐들은 버스위로 탑재하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아래에는 의자가 있고 의자 위에 누울 수 있는 자리도 있었다. 앉아서 가는 게 편할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 잘 수 있는 자리를 잡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보드가야까지 10시간 이상 걸린단다.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잡은 이유인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워 밖을 구경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다가 휴게소에 도착해 20분 쯤 쉬었다. 쉬는 동안 간식으로 저녁 공양을 대신하고 화장실을 다녀온 뒤 다시 출발했다. 휴게소에는 정말 많은 차량들이 서 있었고 실내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했다. 그런데도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돈을 내란다. 씁쓸함을 뒤로 하고 다시 차에 올라 잠을 청했다. 버스는 정말 드문드문 정차했는데 6시간마다 멈춘다고 한다. 차가 세 번째 멈추었을 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인도에서는 제아무리 속도를 내도 평균 40㎞ 안팎에 불과했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 보드가야에 도착했을 때는 출발한 다음 날 오후 3시께였다. 19시간가량 달려서 도착한 셈이다.


보드가야에 도착을 하니 정말 많은 티베트 수행자들이 눈에 띈다. 수많은 순례자들 역시 성도 성지를 비좁게 했다. 순례자들은 우선시킴 정부에서 관리하는 게스트 하우스로 짐을 옮겼다. 린포체의 도착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문안 행렬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여독을 풀었다.


부처님께서 새벽 녘 별을 보고 깨달은 곳 보드가야, 그곳은 2500여년 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흔적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 모두가 그곳에선 부처의 얼굴을 닮은 듯 온화해 보인다. 


시드니 보안 스님 boansun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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