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노스님 [하]
우리 노스님 [하]
  • 법보신문
  • 승인 2011.03.1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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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보다 따뜻한 노스님 깊은 정성
암투병 고통 딛고 일어서는 계기돼

내가 암이라는 진단결과를 통고 받은 것은 2007년 6월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처음엔 선뜻 믿겨지지 않았다. 내가 암이라니…. 허나 그리 오래지 않아 체념하듯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쩌면 평소 허약했던 나의 몸 상태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 못지않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노스님 때문이었다. 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노스님이 충격으로 쓰러지셨으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는 것이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설마 우리 노스님께서….


사람들에게 노스님은 다가서기 어려운 존재였다. 평생 흐트러진 모습 한 번 보이신 적이 없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씀도 거의 없으셨다. 팔순 가까운 연세에도 새벽예불이나 참선을 거르는 일조차 없었다. 신도들이나 다른 스님들에겐 늘 자비로우셨지만 스스로에게나 상좌들에겐 매섭도록 엄격했다.


그런 큰 바윗덩이 같은 노스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다니. 내가 도대체 뭐라고…. 노스님께선 수술실에 들어가는 내게 “화두를 잘 챙기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서 어떤 위로보다 강한 믿음과 신뢰가 전해져 왔다. 그 때문일까. 나중에 다른 분들 말씀을 들어보니 내가 수술실에서 나오는데 내 다리가 안보여 살펴보니 누운 채로 가부좌를 하고 있더란다.


수술 후 나는 잠시 노스님이 계시는 공주 동해사에 머물렀다. 때마침 법당 아래쪽에는 새로 지은 작은 황토방이 있었다. 노스님께서 산과 들로 다니시는 것도 그 무렵부터다. 노스님께선 몸에 좋다는 약초를 캐와 항아리에 차곡차곡 재어 두었다. 또 매일 오후면 손수 내 방에 불을 지펴주셨다. 온돌보다 따뜻한 노스님의 정성이 나를 감쌌다.


새벽 3시, 노스님께서 예불하실 때면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법당 쪽을 향해 절을 했다. 노스님께서 참선하실 시간이면 나도 좌복을 펼치고 앉았다. 그럴 때면 출가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언제든 출가자로 살다 죽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대구에 계시는 한 스님으로부터 복지센터 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잠시 갈등했지만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조금 무리하자 몸 상태가 금방 나빠졌다. 특히 모기한테 물린 왼팔 임파선 쪽이 쉽게 아물지 않았다. 갈수록 덧난 곳이 커져갔고 고름까지 나왔다. 일주일 쯤 지나니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때였다. 은사 스님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대구에 찾아오셨다. 노스님께서 보내셨다며 작은 상자를 끄르셨다. 새하얀 손수건 위에 산삼 3뿌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밤 12시에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며 꼭꼭 씹으라는 말도 함께 전해주셨다. 노스님 계신 절이 가난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콩나물이나 두부 한모 사다먹은 적 없고, 새로 산 승복은 꿈도 못 꿀 정도였다. 그런데도 노스님께선 산삼을 마련해 보내주셨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날 밤 나는 노스님의 당부대로 12시를 기다려 두 시간 동안 천천히 삼을 씹어 삼켰다. 입에선 관세음보살이, 마음속으론 노스님이 떠나지 않았고, 두 눈에선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그 정성 앞에 어찌 낫지 않을 병이 있을까. 며칠 뒤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고, 그 뒤로 지금까지도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고 했다. 우리 노스님은 깊고 깊은 강이다. 지금도 가끔 힘들어질 때면 전화를 드린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동시에 나도 깊은 강이 되어 흐르리라 새삼 다짐하게 된다. 


대엽 스님 동국대병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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