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운엄의 ‘운관축’
13. 운엄의 ‘운관축’
  • 법보신문
  • 승인 2011.03.1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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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麝香〉 같은 스님의 정혜 세상 곳곳 절로 퍼지네

시에 능했던 운엄과 많은 시들 주고받아
禪·戒·茶로 잘 다져진 초의 스님 인품 찬탄


 

▲180여년 전 초의 스님이 정진했던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은 오늘날에도 선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수행처이다. 사진은 아자방에서 정진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  도서출판 동아시아 제공

 

 

초의 스님이 화계동 칠불암과 쌍계사를 찾은 것은 1828년 곡우 무렵이다. 그는 금담 스님을 따라 칠불암에서 서상수계를 받았는데 여기에서 모환문의 ‘만보전서(萬寶全書)’를 필사해 정서한 것이 ‘다신전(茶神傳)’이다. 이 다서의 후기에는 그가 이 책을 쓴 시기와 과정, 어떤 연유에서 이 다서를 정서했는지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그가 칠불암에 가게 된 저간의 사정을 밝히는 과정에서 드러난 대은 스님의 사승관계, 다시 말하면 대은 스님이 연담 스님의 문도였다는 사실은 실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초의 스님에게 전해진 계학의 전승이 대둔사 연담의 문중을 중심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범해의 ‘동사열전(東師列傳)’을 통해 알려졌다.


스님의 이름은 낭오(朗旿)이며 호는 대은이다. 속성은 배씨이고 낭주 사람이다. 건륭경자(1780)년에 나서 월출산에서 출가해 금담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선사는 연담의 제자이다. 스님은 연담, 백련, 의암, 낭암, 완호, 연파의 용상에 나가 참구했다.(師名朗晤 號大隱 性裵氏 朗州人 乾隆庚子生 出家於月出山 剃染於金譚禪師 禪師蓮潭之弟子也 師參於蓮潭白蓮義菴朗岩玩虎蓮坡諸龍象)


이것은 범해의 ‘동사열전’ ‘대은선백전’의 내용인데 대은 스님은 낭주 사람으로 속성은 배씨이며 월출사에서 출가했고, 금담선사의 제자로 연담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월출산은 도갑사를 말한다. 초의 스님이 대은, 금담으로 이어지는 서상수계를 받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이는 대은과 초의가 같은 연담의 문인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된 것은 아닐까. 더구나 초의 스님은 계학을 강조했던 율사라는 점도 서상수계를 잇게 한 요인이라 할 만 하다. 그가 수행에 계학을 중요시했던 정황은 ‘대둔사승보안서(大芚寺僧寶案序)’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계학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였다.


만약 계법을 받지 않으면 문수사리께서 꾸짖기를 ‘금수와 다름이 없다’고 하였고, ‘월등삼 매경(月燈三昧經)’에는 ‘비록 색족(色族)으로 식견이 넓더라도 수계의 지혜가 없다면 금수 와 같다. 설령 비천해서 식견이 좁더라도 청정한 계율을 지킬 수 있다면 훌륭한 사람이 라’고 하였고, ‘범망경(梵網經)’에 ‘중생이 부처의 계를 받으면 제불의 지위에 오를 수 있 다’고 하였으니 계율은 큰 도의 자량(資糧)이 되고 고해를 건너는 배와 뗏목이다.(若無受戒法 文殊師利 訶云 與禽獸無異 月燈三昧經云 雖有色族及多聞 若無戒智如禽獸 雖處卑下少多聞 能持淨戒名勝士 梵網經云 衆生受佛戒 得入諸佛位 戒爲大道之資糧 苦海之船筏)


초의 스님이 ‘계율은 대도의 자양분’이라고 한 점이나 문수사리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계를 받지 않으면 ‘짐승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은 계율을 중시한 초의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는 모두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특히 그가 대승계 제자인 범해에게 준 ‘범해회중학계서(梵海會中學契序)’에서 ‘유학은 예로써 인의를 지키는 것이니 예가 없다면 인의가 무너지고 불교는 율로써 정혜를 지키는 것이니 계율이 없다면 정혜를 잃게 된다. 예와 율은 이름만 다르지 도는 같으니 그 인의를 지키고 정혜를 지키는 것은 모두 가르침의 공력이 아닌 것이 없다(儒以禮持仁義 無之則壞 釋以律 持定慧 無之則喪 禮與律異名同道 其持仁義持定慧 無所以學敎之功力也)’라 한 것에서도 계학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렇게 다져진 초의 스님의 수행 풍모는 당시 그와 교유했던 인사들의 공통된 칭송이었다. 임진(1842)년 10월에 운엄 김각(雲厂金珏)이 초의에게 보낸 ‘운관축(雲館軸)’의 ‘부대둔칠사(付大芚七師)’에는 이러한 정황이 잘 드러난다. 운엄은 김각의 호이다. 그의 생몰 년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함양 사람이며, 한동안 해남에 머물렀고, 호남 칠고붕(七高朋)이라는 것과 평생 산림에 살면서 양생에 힘썼고, 시에 능했던 인물로만 알려진다. 그가 초의 스님과 언제부터 교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 간에 주고받은 시문이 다수 전해지고, 초의의 ‘일지암시고’에도 여러 편의 시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종유(從遊)가 막역한 사이였음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초의에게 도가의 태식법을 가르쳐 주었고, 초서와 시에 능했던 창암 이삼만과도 가까웠던 인물이라는 점은 그가 산림거사이지만 행실과 글이 능했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백파 ‘선문수경’ 비판은 세상에 불교 드러낸 일
추사 등 참여 이끌어낸 초의 역할은 후인 귀감

 

 

 초의 스님의 수행과 덕화를 찬탄한 내용을 담고 있는 도판 운엄 김각의 ‘운관축’.

 


김각이 교유했던 초의와 호의, 수룡, 철선, 경월, 서주, 만휴 같은 대둔사 승려들을 칭송해 지은 ‘운관축’의 ‘부대둔칠사(付大芚七師)’는 이들에 대한 찬시(讚詩)이다. 이 찬시의 형식은 칠언절구로, 각 인물들의 이름을 첫 구의 시작어로 삼아 이들의 수행풍과 사람 됨됨이를 노래했다. 특히 초의에 대한 찬시는 당시 그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검소한 옷과 소식하는 스님, 온전한 몸이라 할 만한대(草衣蔬食可全身)/ 산 중에서 지낸 것이 60년이라(一臥山中六十年)/ 사향노루의 향기는 저절로 먼 곳까지 퍼져서(有麝自然香播遠)/ (초의의) 명성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자하다네(名聲藉藉世間人).


초의(草衣), 소식(蔬食)은 검소한 수행자의 일상이라, 계율에 엄격했던 초의 스님의 수행생활을 말한 것이고, 산 중에서 60년을 지낸다는 것도 당시 초의 스님의 나이가 57세임을 드러낸 말이다.


이렇게 선과 계학, 차로 다져진 초의의 정혜(定慧)는 마치 사향노루와 같아서 절로 멀리 알려졌다는 것. 수행의 자비를 사향노루의 향으로 비견한 운엄의 안목은 그 또한 담박한 군자를 이상으로 삼았던 선비임이 분명하다. 초록은 동색(同色)인지라 동류(同類)가 모여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치. 사향을 지닌 노루는 바람 앞에 서지 않아도 은은한 향내가 절로 퍼지듯이 초의 스님의 명성도 세상에 자자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초의와 교유했던 인사들의 한결같은 칭송이고 보면 그가 어떤 인품을 지닌 수행자였는지는 눈앞에서 보는 듯 선명해진다. 한편 호의 스님에 대한 찬시는 당시 대둔사 수행승의 다풍을 짐작할 수 있다.


소박한 옷, 화려한 비단옷으로 바꾸지 않고(縞衣不換錦衣華)/ 향기로운 향, 피우고 차를 마시네(一炷名香一椀茶)/ 대둔 산내 장춘동의 아름다운 햇살(大芚山裏長春景)/ 도원동 복숭아꽃보다 더 아름답구나(全勝桃源洞裏花)


호의(1778~1868) 스님은 완호의 직전 제자로 초의 스님의 사형이다. 호의(縞衣), 하의(荷衣), 초의(草衣)를 일컬어 삼의(三衣)라 부른다. 그의 이름은 시오(始悟), 아명은 계방(桂芳)이고 호의는 호이다. 속성은 정씨요, 동독 적벽사람이다. 무술(1778)년 7월16일에 태어나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재난을 당했던 구월사의 중수에 도료장(都料匠)으로 응모했다가, 이 일을 마친 후 만연사(萬淵寺) 승려를 따라가서 백련선사(白蓮禪師)에게 나아가 계를 받고 출가한 것이 병진(1796)년이다.


그는 천불전을 조성할 때 기림사에서 완호를 모시고 천불을 조성했는데 경주에서 대둔사로 이운하던 천불이 해풍으로 인해 표류될 때 일본까지 천불을 모신 것도 그였다. 다산선생은 그의 종의(宗誼)를 돈독히 여겨 그에게 호게(號偈)와 글을 써 주었다. 그는 참선 중에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운 것으로 전해진다.


▲박동춘 소장
한편 실전(失傳)되었던 계학(戒學)을 바로 세우고, 침체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했던 이들의 노력 일면에는 대둔사 연담의 문중이 중심이 되었다. 초의 스님이 백파의 ‘선문수경’에 그릇된 점을 일일이 지적한 ‘선문사변만어’는 사회적인 영향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불교의 입장을 세상에 드러낸 것. 이는 불교계뿐만 아니라 추사학파까지 논쟁에 참여케 했고, 이 논쟁이 근현대까지 활발히 이어질 수 있었던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초의의 역할은 후인의 귀감이 되기에 족하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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