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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섯 촘마들과의 동행

기자명 법보신문

 

▲삭막한 협곡의 거친 길을 걸어 오가는 촘마들은 오랜 친구를 대하듯 이방인과의 동행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우선, 이번 목적지인 리종곰파에 대한 설명을 먼저 좀 해야겠다. 왜 이곳을 꼭 들려야하는지, 목적이 뚜렷하지 않고서는 굳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리종곰파는 레에서 서쪽으로 70㎞ 떨어진 리종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지역의 이름을 따서 리종곰파라 부른다. 하지만 사원을 부르는 또 다른 별칭은 ‘수행의 낙원’. 동시에 엄격한 규율과 규범으로도 유명하다.


리종곰파는 1831년 출팀 님마 스님에 의해 세워졌다. 험준한 바위산이 요새처럼 둘러쳐져있는 이 협곡의 바위동굴에서 3년간 폐문한 채 정진하던 님마 스님의 수행이 알려지면서 스님들과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라다크의 왕과 왕비까지 직접 이곳을 방문, 수행처 건립을 후원해 탄생한 도량이 바로 리종곰파다.


리종곰파가 세워지기 전부터도 이 지역은 유서 깊은 수행처였다. 구루린포체로 불리는 파드마삼바바를 비롯해 수많은 스님들이 이곳의 바위 동굴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오랜 인연에 걸맞게 리종곰파에는 지금도 엄격한 수행의 전통이 살아있다.


특히 출팀 님마 스님은 율장에 따른 규범을 강조했는데 지금도 그 전통은 생생하다. 스님들은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사원 밖으로 외출할 수 없으며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침대나 침구 등도 제공되지 않는다. 스님들은 여자 형제를 포함해 여성들이 손댄 그 어떤 물건과도 접촉할 수 없으며 일출부터 일몰 때까지 물을 떠올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방을 떠날 수가 없다. 개인이 소유 할 수 있는 것은 바늘뿐이며 사원으로 들어온 보시는 무엇이든 모든 스님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


낯선 이에게 불쑥 내민 사과 몇 알

 

 

▲어엿한 수행자이지만 아직은 애티가 가득한 10대의 소녀 촘마들. 카메라 앞에서 제법 폼을 잡아 보이더니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린다.

 


이렇게 엄격한 규범에 따라 수행하는 도량이 바로 리종곰파다. 그러니 절대 지나칠 수 없다. 도로 붕괴로 차량출입이 금지된 까닭에 비포장 길을 왕복 두 시간 이상 걷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사실 두 시간 정도 걷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시간과 날씨다. 리종곰파로 이어지는 길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3시30분. 6시 즈음 해가 지니 시간이 좀 빠듯하긴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그보다는 날씨가 더 불안하다.


“우리가 구름을 몰고 다니는 것 같아.”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하는 법이다. 벌써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태양보다 꾸물꾸물한 날씨가 더 마음을 바쁘게 한다. 구름이 잔뜩 몰려들기 시작한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리종곰파로 이어지는 작은 도로 입구에서 차를 내린다. 입구에는 일주문 같은 것을 짓고 있는지 길을 꽉 막고 공사 중이다. 우회도로도 만들지 않고 이렇게 길을 막은 채 공사를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어찌하리. 가벼운 트레킹 기회가 생겼다고 좋게 생각하며 배낭에 물과 카메라 등 간단한 짐만 꾸려 출발한다.


그런데 그냥 평범하고, 조금은 지루할 것 같던 도보길에 동행이 있다. 200여 미터 앞에 꼬마 스님 다섯 명이 올망졸망 무리를 지어 가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도 우리를 보았는지 뒤를 힐끔 거리며 간간히 웃음을 터뜨린다. 자세히 보니 촘마라고 불리는 사미니 스님들이다. 상자 하나와 보따리 몇 개를 서로 번갈아가며 들고 있다. 제법 묵직해 보인다. 걸음을 조금만 빨리하면 따라 잡을 것 같아 발길을 재촉한다. 얼마 되지 않아 촘마들과 나란히 걷게 됐다.


짧은 동행, 아쉬운 작별, 긴 여운

 

 

촘마들의 수행처인 젤리춘수도원.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보았던 것 보다 더 어린 스님들이다. 말끔히 삭발한 머리에 붉은 티베트식 가사까지 갖추었지만 티베트불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라다크에서 이들은 비구니가 아닌 여성수행자(Nun)의 신분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냥 해맑은 아이들로 보인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암만 스님은 17살. 가장 어린 라모 스님은 10살. 촘마들은 큰길가의 상점에서 국수와 사과 등 먹을거리를 사가는 길이다. 인사를 건네며 슬쩍 길동무를 자청해 본다. 낯선 이방인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는 촘마들은 상자 속에서 사과 몇 알을 꺼내 불쑥 내민다. 처음 보는 이에게 스스럼없이 사과를 내미는 작은 손. 또 다른 라다크식 인사 같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든다. 그러나 우리 배낭 속에 든 것이라고는 물 한 병 뿐. 그 흔한 사탕 하나 때마침 없으니 미안한 마음이다.


가장 연장자인 암만 스님은 가장 무거운 상자를 자신이 들고 가려 하지만 나이 어린 도반들이 이를 가만 두지 않는다. 서로 자기가 들겠다며 상자가 이 손 저 손으로 오가길 몇 차례, 허술해 보이던 종이 상자는 결국 밑이 찢어지고 말았다. 길가에 와르르 쏟아진 사과가 이리저리 굴러가는데 뭐가 그리 웃긴지 촘마들의 웃음소리가 계곡에 가득하다.


촘마들이 생활하고 있는 젤리춘수도원까지는 40분 거리다. 아직 어린 촘마들은 영어를 잘 못하지만 가장 연장자인 암만 스님은 간단한 대화가 가능하다. 그런데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무엇을 물어보든 얼굴부터 빨개진다. 한창 부끄러움 많은 17살 아닌가. 그래도 가장 무거운 상자를 끝까지 책임지는 암만 스님의 모습에선 제법 어엿한 수행자의 태가 묻어나기 시작한다. 갑자기 가장 어린 라모 스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노래할 줄 아냐고 묻는다. 제법 진지한 표정을 보니 불끈 용기가 솟는다. 아직 고산 적응이 되지 않은 탓에 그냥 걷기에도 숨이 차지만 되도 않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본다. 그야말로 고래고래. 그래도 끝까지 들어주는 촘마들이 고맙다.


좁은 협곡, 거대한 공룡 뼈의 화석처럼 쭉쭉 뻗어있는 바위산이 사방을 에워싼 삭막한 산길에서 어린 스님들의 붉은 가사가 바람에 나부끼며 꽃처럼 계곡을 수놓고 있다. 해맑은 웃음소리가 향기처럼 퍼지는 사이 어느덧 40여분이 후딱 지나 젤리춘수도원 앞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삭막한 계곡과는 달리 수도원은 울창한 숲이 포근히 감싸고 있다. 숲속의 수도원을 가리키며 내 손을 잡아끈다. 안에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란다. 가벼운 고산 증세 때문에 숨도 차고 어지러워서 촘마들의 초대에 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담아 수도원 입구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며 목적지 리종곰파로 발길을 돌린다.


먼 동쪽의 ‘코리아’라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과의 이 짧은 동행이 어린 촘마들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을까. 새털 같이 많은 날이 지난 후 그들은 오늘의 동행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저 동양에서 왔다는 이가 리종곰파로 간다며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고 기억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없이 황량해 보이는 거친 길에서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으려던 이방인의 손목을 잡아 주던 어린 스님의 작고 따뜻했던 손. 첫 인사를 나누자마자 불쑥 내밀었던 사과 몇 알의 추억과 어설픈 노래에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보여준 그 미소를 우리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순수한 미소야말로 거친 땅 라다크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꽃이기 때문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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