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남북 있으나 부처의 성품엔 차별이 없다
사람에겐 남북 있으나 부처의 성품엔 차별이 없다
  • 법보신문
  • 승인 2011.05.06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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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 스님 땔나무 해다 팔며 가난한 생활
손님의 ‘금강경’ 독송 소리에 문득 깨우쳐
스승을 찾아 홍인 스님의 동산회상에 들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했던 인도 슈라바스티의 기원정사.

 

 

2. 심사(尋師)


“혜능 대사는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하라.
대사께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고 한참 묵묵하신 다음 이윽고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조용히 들어라. 혜능의 아버지의 본관은 범양인데 좌천되어 영남의 신주 백성으로 옮겨 살았고 혜능은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늙은 어머니와 외로운 아들은 남해로 옮겨와서 가난에 시달리며 장터에서 땔나무를 팔았더니라. 어느 날 한 손님이 땔나무를 샀다. 혜능을 데리고 관숙사(官宿舍) 에 이르러 손님은 나무를 가져갔고, 혜능은 값을 받고서 문을 나서려 하는데 문득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보았다. 혜능은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치고, 이내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하였다. 손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홍인 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 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숙세의 업연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다.”


(能大師言 善知識 淨心念摩訶般若波羅蜜法 大師不語 自淨心神 良久乃言 善知識 靜(淨)聽 惠能慈父 本官范陽 左降遷流(嶺)南 新州百姓 惠能幼小 父小早亡 老母孤遺 移來(南)海 艱辛貧乏(之) 於市賣(買)柴 忽有一客買柴 遂領惠能 至於官店 客將柴去 惠能得錢 却向門前 忽見一客 讀金剛經 惠能一聞 心明(名)便悟 乃問(聞)客曰 從何處來 持此經典 客答曰 我於蘄州黃梅縣(懸)東憑茂(墓)山 禮拜五祖弘忍和尙 見今(令)在彼門人 有千餘衆 我於彼聽見 大師勸道俗 但持(特)金剛經一卷 卽得見性 直了成佛 惠能聞說 宿業有緣 便卽辭親 往黃梅憑茂(墓)山 禮拜五祖弘忍和尙)


이번 강의는 심사(尋師)입니다. 스승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혜능 스님께서는 법문을 하시기 전에 마하반야바라밀법(摩訶般若波羅蜜法)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뒤 입정(入靜)에 듭니다. 마하반야바라밀법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큰 지혜로 모든 고통과 번뇌를 여의고 피안에 이르는 법’을 말합니다.


혜능 스님 집안이 가난해서 땔나무를 해다 팔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배움 또한 깊지 않았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한번 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쳐 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들과 근기가 달라도 한참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금강경’을 읽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해가 되시던가요. 혜능 스님처럼 마음이 밝아졌느냐 그 말입니다. 이해를 했다면 바로 마음이 밝아져서 혜능 스님처럼 되었겠지요. ‘금강경’을 읽어도 마음이 안 밝아지니 깨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이 많이 하는 기도가 관음 기도입니다. 기도는 경전을 읽거나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기도를 열심히 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져서 종국에는 깨닫게 됩니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하십니까. 마음으로 혹은 입으로 기도를 하지만 바라는 바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복을 달라거나, 또는 고통을 없애 달라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런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본질도 또한 아닙니다. 어떤 기도이든지 본질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며 소리를 내는 주체가 누구인지 살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염불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을 바라고 소원을 비는 것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염불이나 기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혜능 스님은 다른 사람이 ‘금강경’을 읽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본질을 깨우친 것입니다. 우리 또한 기도를 하든지 ‘금강경’을 읽든지, 본질에 집중하며 기도를 해야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혜능은 한번 들음에 마음이 밝아져 문득 깨치고, 이내 손님에게 묻기를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읽습니까’ 하였다. 손님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오조 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혜능은 숙세의 업연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가서 오조홍인 화상을 예배하였다.”


위 내용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금강경’에 의지해서 수행하면 반드시 성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선불교에서 ‘금강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남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선불교가 태동하면서 ‘능가경(楞伽經)’과 ‘금강경’을 중시했습니다. ‘능가경’은 여래장(如來藏), 아뢰야식(阿賴耶識)과 같은 개념을 통해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능가경’은 양이 많을 뿐 아니라 분석적이고 논리적이어서 중국인 기질에는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국인, 딱히 중국이라기보다 동양 사람들은 논리보다는 직관을 좋아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본질에 접근해 가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절차와 과정은 생략한 채 본체로 바로 직통해 버립니다.


‘능가경’과 달리 ‘금강경’은 간결하고 함축적입니다. ‘공(空)’이라는 글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그 근본 가르침은 ‘공(空)’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금강경’이 훨씬 마음에 와 닿았고 자연스럽게 선불교의 소의경전이 됐던 것입니다. 부연하면 ‘금강경’은 600권에 이르는 반야경전 중 한 권으로 비교적 초기 경전입니다. 이유는 ‘공’이라는 개념이 성립되기 전에 쓴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보시바라밀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보시(布施)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개념이라기보다 내가 지니고 있는 번뇌와 망상을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 성립된 홍인 스님의 교단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1000여 명이 모여서 함께 수행했다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선원의 원형입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뤄 함께 수행하는 형태가 없었습니다. 이때가 서기 7세기 초 무렵으로 이때서야 비로소 선 수행을 하는 전문적인 수행자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홍인 화상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 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하였다. 오조 대사께서는 혜능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 사람이요 또한 오랑캐거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오조 스님은 함께 더 이야기하시고 싶었으나,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것을 보시고 다시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그 때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弘忍和尙 問惠能曰 汝何方人 來此山禮拜吾 汝今向吾邊 復求何物 惠能答曰 弟子是嶺(領)南人 新州百姓 今故遠來 禮拜和尙 不求餘物 唯求作佛法 大師遂責惠能曰 汝是嶺(領)南人 又是獦獠 若爲堪作佛 惠能答曰 人卽有南北 佛性(姓)卽無南北 獦獠身與和尙不同 佛性(姓)有何差別 大師欲更共議 見左右在傍邊 大師更不言 遂發遣惠能 令隨衆作務 時有一行者 遂差惠能於碓坊 踏碓八箇餘月)


이 단락은 ‘육조단경’을 통 털어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결국에는 부처가 돼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선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을 보아서 성불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견성(見性)은 자기 자성을 본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자성, 성품, 본질을 보면 곧 성불(成佛)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화엄경’ 같은 경전에서는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3아승지겁((阿僧祗劫)이 필요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를 이루고 등각(等覺) 묘각(妙覺)을 지나야 비로소 부처에 이를 수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수행과 보살행이 뒷받침될 때 성불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바로 부처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영가증도가(永嘉證道歌)’에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 如來地)라고 했습니다. 중생에서 한걸음에 부처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과정과 수행 단계가 생략돼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와 중생에 어떤 차이도 없다는 신념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혜능 스님은 출가 전에 이미 ‘금강경’ 독송 소리를 듣고 마음이 맑아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인 홍인 스님이 느닷없이 오랑캐가 어떻게 부처가 된다는 말이냐 하며 한방을 날립니다. 그러자 혜능 스님은 당당히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차이가 있겠지만 불성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비유컨대 바닷물이 파도가 되지만 파도의 본질은 바닷물이듯이 중생과 부처는 다르지만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종광 스님
‘화엄경’에는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수행을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면 부처입니다. 비록 욕심이라는 놈이 이를 가로 막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부처입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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