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화가가 빈종이 위에 갖가지 그림을 그리듯,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화엄경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빛이 있다. 옛 사람들은 반딧불을 이용해 책을 읽었다 한다. 그러나 등잔불이 등장하자 반딧불은 죽어버렸다. 등잔불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이제 반딧불에 책을 읽을 수는 없다. 반딧불의 몇 만배 밝은 등잔불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촛불이다. 촛불 앞에서 등잔불은 패잔병이다. 그 사람은 이번에는 등잔불을 버리고 촛불 앞에 간다. 촛불의 밝음은 등잔불의 갑갑함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전깃불이 나타났다. 촛불의 그것은 전깃불 앞에 가면 약소국가인 것이다. 슬픈 운명의 멍에를 짊어지고 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전깃불의 저 불빛권을 벗어날 수는 없다. 전깃불을 맛본 사람은 당연히 촛불을 버릴 것이다. 촛불은 그 나름대로의 아늑함이 있다하나 불이 날 위험 때문에 안정감이 없다.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머언 회상의 길목을 더듬고 싶어지면 이 촛불 한 자루에 나를 맡길지도…. 그러나 그 밤이 지나고 내일 밤도, 모레 밤도, 또 그 다음날 밤도 촛불만 켜고 있으라면 짜증이 날 것이다. 그것은 촛불보다 훨씬 밝고 안전한 전깃불이 있음을 안 때문이다. 허, 또 ‘그러나’가 있다. 아침이 되어 봐라. 해가 떠오른다. 햇빛 앞의 전깃불은 털을 뽑아버린 닭새끼의 모습이다. 그러나 햇빛은 또 그보다 더 밝은 빛 앞에서는 역시 패배자일 것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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