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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땐 일하고 놀 땐 노는 것, 이것이 선수행자

기자명 법보신문

‘80년 전에는 그대가 나였더니(八十年前渠是我)/ 80년 후 오늘에는 내가 그대구나(八十年後我是渠)’  

청허집


여기에서 ‘그대’는 참의 자리를 가리고 있는 거짓의 자기[假我], ‘나’는 그 거짓의 자리로부터 떠난 참의 자기[眞我]로서의 자기의 본래 모습을 말한다. 우리의 비극은 ‘참나’의 본질에 있어서는 같지만 이 육체를 가진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개개인은 변질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나’의 본질에서 각기 다른 우리 개개인이 동질의 것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어서 그 죽음의 적정(寂靜)으로부터 이 역동적인 삶으로 되돌아온 수행자들은 모두 기계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참나를 찾은 그들에게는 각기 그들 나름의 개성도 있으며, 그들의 스승과 그의 사이에 어리는 그들대로의 가풍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나로 되돌아간 그 근본에서 보면 역시 동질이다. 여기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묘미가 있다.


그러면 참나에게서 떨어져나간 개인으로서의 변질은 어떤 것인가. 소아(小我)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판단도 올바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만 자기 이외의 다른 일체를 보기 때문에 마찰과 갈등, 고뇌가 이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 소아를 부숴버리고 참의 나인 대아, 즉 보편아에 돌아갔으므로 공평무사하다. 선의 윤리는 무욕, 담박에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不捨一法) 어느 하나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不受一塵). 일체의 감정에서 떠났기 때문에 사사로운 감정은 없지만, 남을 위해서, 이 사회를 위해서는 노여워도 하고 기뻐할 수도 있다. 여기에 감정의 스케일이 있다. 풍류가 아닌 곳이 오히려 풍류(不風流處也風流)라는 역설이 있다.

 

▲석지현 스님

선 수행자의 사물에 대한 판단은 깊고 짧다. 일단 판단이 끝나면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돌격한다. 이 판단과 행동력은 능률적이며 매사에 쉽게 몰입할 수가 있다. 마음이 비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에나 쉽게 열중할 수가 있다. 일을 할 때는 철저히 하고 또 놀 때는 철저히 노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상 철저히 살고 또 죽어야 할 때는 자취마저 없이 죽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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