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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가풍, 준엄·날카로움만 요구하면 미치광이 선

기자명 법보신문

도 완전히 깨치지 못하면 걸림없는 경지 흉내 내도 공 집착한 외도가 될 뿐
깨달음을 얻고자 하지만 그림자를 진짜라고 하니 병통으로 법을 삼기 때문

82. ‘예’란 신뢰가 깨진 데서 생긴 규범

 

 

▲ 돈황 막고굴 장경동 벽화. 당나라 작품

 


若實親省 現證自宗 尙無能證之智心 及所證之妙理 豈況更存 能知能解 有得有趣之妄想乎. 近代 或有濫參禪門 不得旨者 相承不信卽心卽佛之言 判爲是敎乘所說 未得幽玄. 我自有宗門向上事在 唯重非心非佛之說 並是指鹿作馬. 期悟遭迷 執影是眞 以病爲法. 只要門風緊峻 問答尖新 發狂慧而守癡禪 迷方便而違宗旨. 立格量而據道理 猶入假之金 存規矩而定邊隅 如添水之乳.


만약 스스로 ‘본디 갖추고 있는 깨달음’을 진실로 증득한다면 ‘증득하려는 마음’과 ‘증득되는 오묘한 이치’조차 없는 것인데, 어찌 다시 ‘알음알이’에 ‘나아갈 곳이 있다는 망상’을 하겠는가. 요사이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으뜸가는 깨달음’에 어두운 사람들은 ‘마음이 곧 부처’란 말을 믿지 못해 그것은 아직 깊고 오묘한 뜻을 얻지 못한 교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라고 속단해 버린다. 자신에게 종문의 으뜸가는 공부가 있다면서 오직 ‘마음도 아니요 부처님도 아니다’는 말만 중요시하고 있으니, 이 모든 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하지만 어리석어 그림자에 집착하여 진짜라고 하니, 이는 병통으로써 법을 삼기 때문이다.


오로지 선문의 가풍이 준엄하고 문답이 날카롭고 참신하기만을 요구하니, 사리분별이 없이 ‘미치광이 선’을 고수하고 방편에 미혹하여 ‘참다운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난다. 일정한 틀을 세워 도리로 삼으니 이는 마치 임시방편을 금이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으뜸가는 깨달음’을 자신의 잣대로 변두리라 정하니 이는 물을 탄 가짜 우유나 마찬가지이다.


一向於言語上取辦 意根下依通 都爲能所未亡 名相不破 若實見性 心境自虛 匿跡韜光 潛行密用. 是以 全不悟道 唯逐妄輪迴 起法我見 而輕忽上流 恃錯知解 而摧殘未學 毁金口所說之正典 撥圓因助道之修行 斥二乘之菩提 滅人天之善種. 但欲作探玄上士 傚無礙無修 不知返墮無知成空見外道. 唯觀影跡 莫究圓常 積見不休 徒自疲極.


이처럼 언제나 언어로 판단하고 분별로 도를 통하려고 하는 것이 모두, 아직 알아차리는 마음인 ‘능(能)’과 대상경계인 ‘소(所)’가 사라지지 않았기에 개념과 허상의 실체를 타파하지 못한 것이니, 진실로 자신의 성품을 보았다면 ‘마음’과 ‘경계’가 저절로 비어지고 자취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온전한 부처님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를 완전히 깨치지 못하면 허망한 윤회만 좇으며 잘난 체 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공부하는 수행자를 홀대하며 잘못된 알음알이로 후학들의 기를 꺾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며 올바른 수행을 배제하고, 이승의 깨달음을 배척하며 하늘과 인간에 태어날 착한 종자를 없애는 것이다. 다만 깊은 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되고자 ‘걸림 없고 닦음 없는 경지’를 흉내 내지만 도리어 ‘무지(無知)’에 떨어져 공에 집착한 외도가 된 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그림자만 보며 영원한 진리를 찾지 않으니 끊임없이 분별만 쌓여가고 부질없이 몸과 마음을 고달프게 할 뿐이다.


如孔子迷 津問漁父 漁父曰 人有畏影惡跡 疾走不休 絶力而死 不知處陰以休影 靜處以息跡 愚亦甚矣. 何不一心爲道 息諍除非 自然過量超情 還淳返朴. 若以道自養則 不失 以道濟他則 不誑 以道治國則 國泰 以道修家則 家安 故不可頃刻忘道矣. 所以 道德經云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이는 공자가 길을 잃고 나루터에서 길을 물어볼 때, 어부가 “자신의 그림자와 발자취를 싫어하고 두려워한 사람이 도망치려 쉬지 않고 달리다가 기력이 다해 죽어 버렸습니다. 가만히 그늘 아래 있으면 그림자와 발자취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참으로 어리석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찌 한마음으로 도를 삼아 온갖 그릇된 다툼을 쉬고 자연스레 알음알이 분별을 뛰어넘어 순박한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가. 만약 ‘도(道)’로써 살아가면 양심을 잃지 않고 ‘도’로써 남을 제도하면 속이지 않으며,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태평해지고 ‘도’로써 집안을 다스리면 집안이 편안해지니, 그러므로 잠시라도 ‘도’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경’에서 “도(道)를 잃고 난 뒤 ‘덕(德)’이 생겼고 ‘덕’을 잃고 난 뒤 ‘인(仁)’이 생겼으며, ‘인’을 잃고 난 뒤 ‘의(義)’가 생겼고 ‘의’를 잃고 난 뒤 ‘예(禮)’가 생겼으니 무릇 ‘예’란 마음속 신뢰가 깨진 데서 생긴 규범이니 곧 어지러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걸 말해준다.”라고 하였다.


莊子云 五色不亂 孰爲文彩 五聲不亂 孰爲律呂 白玉無瑕 孰爲珪璋 殘朴以爲器者 工匠之罪 毁道德而爲仁義者 聖人之罪 君能焚符破璽 賊盜自止 剖斗折衝 而民不諍 聖人生而賊盜起 聖人死而賊盜止 故仁義禮智信而利天下者少 害天下者多矣. 曷如開示如是不思議大威德廣大法門 普廕十方 群生等潤. 可謂 深達妙旨 冥合眞歸.


이런 내용을 ‘장자(莊子)’에서도 “오색(五色)이 어지럽지 않다면 누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듬으려 하고, 오성(五聲)이 어지럽지 않다면 누가 음양의 소리를 조율하려 하며, 온갖 백옥에 티가 없다면 누가 ‘티 하나 없는 규장(珪璋)’이란 옥(玉)을 소유하려 하겠는가. 박달나무를 베어 그릇을 만든 것은 공예가의 허물이고 도덕(道德)을 훼손하여 인의(仁義)를 내세운 것은 성인의 허물이니, 그대가 임금이 내린 벼슬을 물리칠 수 있다면 도적은 절로 없어지고 수량을 헤아리는 도구와 저울을 쪼개 없앨 수 있다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는다. 성인이 나오자 도적이 생기고 성인이 죽자 도적이 사라지니, 그러므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천하를 이롭게 하기는 드물고 오히려 천하를 해롭게 하는 일이 많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세속의 가르침들이 어찌 불가사의한 위엄과 덕을 갖춘 법문으로 두루 남모르게 온 세상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부처님의 자비심과 같겠느냐. 이러한 부처님의 자비심은 오묘한 종지를 깊게 통달하여 참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如香象渡河 步步到底 似養由駕箭 一一穿楊 盡爲破的之文 皆是窮源之說. 此是圓頓義 非權宜門. 如水月頓呈 更無來去 猶明鏡頓照 豈有前後.


이는 향기로운 푸른 코끼리의 걸음걸음이 강바닥에 닿는 것 같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양유기의 화살 하나하나가 작은 버들잎을 뚫는 것 같아, 모두 핵심을 찌르는 말씀들이고 철저히 근원까지 파헤치는 내용이다. 이것이 ‘원돈(圓頓)’의 이치이니 상황에 맞춘 방편이 아니다. 물속의 달이 갑자기 나타나지만 오간 자취가 없듯 밝은 거울에 문득 비치는 모습과 같은 것인데, 여기에 어찌 전후의 차별이 있겠는가.


강설) 오색은 파랑, 노랑, 빨강, 하양, 검정인데, 사람들이 분별심 때문에 이 빛깔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오색이 어지러워지고, 이 때문에 그 누군가 어지러운 오색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듬으려 하게 된다. 만약 오색 빛깔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분별이 없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듬으려고 하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궁, 상, 각, 치, 우 다섯 가지 소리를[五聲] 듣고서도 좋고 싫음의 분별이 없다면 소리를 조율하려는 마음조차 없을 것이다.


83. 텅 빈 마음에 육바라밀을 다 갖춰


經云 空心不動 具足六波羅蜜. 何者 經云 無可與者 名爲布施 豈心外有法可住相耶. 經偈云 戒性如虛空 持者爲迷倒 寧執事法 分持犯耶. 經云 忍者 於一刹那 盡一切相及諸所緣 又云 何謂菩薩能行忍辱 佛言 見心相念念滅 豈可伏捺自心 對治前境而爲忍受耶. 經偈云 若能心不起 精進無有涯 又云 何謂菩薩能行精進 佛言 求心不可得 寧著有爲 妄興勞慮耶. 經云 不見心相 名爲正定 豈避喧雜而守靜塵耶. 經云 不求諸法性相因緣 是名正慧 寧外徇文言 强生知解耶.


경에서 “흔들리지 않는 텅 빈 마음에 육바라밀을 다 갖춘다.”고 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경에서 “줄 만한 게 없는 것 이를 일러 ‘보시’라고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니, 어찌 마음 밖에 집착할 만한 어떤 법이 있겠느냐. 또 경의 게송에서 “허공 같은 ‘계(戒)’의 성품을 지닌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고 하였으니, 어찌 드러난 현상에 집착하여 ‘계(戒)’에 대한 분별을 하겠느냐. 경에서 “인욕이란 한 찰나에 모든 모습과 그 인연을 없애는 것이다.” 하고, 또 “무엇을 일러 보살이 ‘인욕’을 실천한다는 것입니까?” 하자, 부처님께서 “마음의 모습을 보니 생각 생각에 그 모습이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답변하셨으니, 단지 자신의 마음을 꼭꼭 누르며 눈앞의 경계를 참아 다스리는 것을 어찌 인욕이라 할 수 있겠느냐. 경의 게송에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진’은 끝이 없다” 하고, 또 “무엇을 일러 보살이 ‘정진’을 실천한다는 것입니까?” 하자, 부처님께서 “구하는 마음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답변하셨으니, 어찌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여 허망하게 번뇌를 일으키겠느냐. 경에서 “마음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것 이를 일러 ‘바른 선정’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시끄러운 마음을 피해 고요한 번뇌만 지키겠느냐. 경에서 “모든 법의 성품과 모습에 대한 인연을 찾지 않는 것 이를 일러 ‘바른 지혜’라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밖의 언어 문자를 좇아 억지로 알음알이를 내겠느냐.

 

▲원순 스님

강설) 바라밀(波羅蜜)은 ‘Paramita’의 음역인데 부처님 세상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육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이 여섯 가지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 세상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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