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림처사 운암 김각
19. 한림처사 운암 김각
  • 법보신문
  • 승인 2011.06.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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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스님 석장을 짚고 만중산에서 날 찾아왔네”

운암은 연단술 밝은 유학자
시문에 능한 호남의 칠고붕

초의 스님과 나눴던 시문
‘운관축’에 고스란히 기록

 

 

▲ 운암은 유학자이면서도 도교에도 밝아 초의 스님에게 도인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는 ‘차향이 자리에 가득, 돌아감을 잊었네’라고 했을 정도로 초의 스님과의 만남을 기뻐했다. 사진은 운암의 친필 시고.

 

 

운암 김각(雲菴 金珏)은 연단술(鍊丹術)에 밝았던 유학자로, 자(字)는 태화(太和)이며, 운암(雲菴), 운옹(雲翁), 운와(雲臥), 운엄(雲广) 등의 호를 썼다. 함양 출신으로, 한때 해남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행적에 대한 편린은 ‘일지암시고(一枝菴詩稿)’와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에 남아 있다. 특히 그가 초의에게 보낸 시 모음집인 ‘운관축(雲館軸)’에는 그의 시격(詩格)뿐만 아니라 초의에 대한 존경심과 애틋한 마음이 행간(行間)에 배어난다. 경향(京鄕)에 이름이 알려졌던 대둔사 승려들과 해붕(海鵬) 스님과도 내왕했던 인물이었던 그는 호남의 칠고붕(七高朋)으로 칭송되었던 사람, 운암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문재가 출중한 인물로, 한림처사를 자처했다.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1770~1845)과도 화운할 만큼 시에 능했다. 호남 칠고붕으로 칭송된 노질(盧質), 이학전(李學傳), 심두영(沈斗永) 등과도 친밀했다. 그가 1842(壬寅)년 완성서관(完城書館)에 있을 때 초의와 나눈 가회(佳會)의 아름다움은 ‘운관축’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운엄노인이 완성서관에 머물 때 마침 초의 스님이 찾아왔기에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등불을 밝히고, 스님이 다녀온 금강산의 승경을 얘기 듣다가 밤이 깊어지자 졸음이 왔다. 팔을 베고 누어 코를 골며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 문을 여니 서릿발처럼 밝은 달이 하늘에 가득하다. 땅위에 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바로 한 사람은 오하사이고 또 한 사람은 김석누이었다. (이들은) 대개 초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맞이해 방으로 들게 하고, 다시 등불을 켜고 화롯가에 빙 둘러앉으니 네 사람의 고회가 되었다. 서로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시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운(詩韻)을 내는 것을 서로 미루다가 나는 하사에게 말하고 하사는 나에게 미루었고, 석누와 초의 또한 그렇게 하였다.


(雲广老人滯臥完城書館之日 適逢草衣師來 偕喫晩飯 占燈聊榻從談金剛山勝 至夜久睡思 至枕臂齁齁而睡 忽驚有剝啄聲 卽起開門則霜月滿天 地上之人影有二一是吳河槎一是金石루盖聞草衣之風而來者也 迎而入室更占燈圍爐而坐團團四人高會也 相見而笑曰不可無作 相推呼韻 雲曰河 呼河曰雲 呼石與草亦然)


이것은 ‘운관축’ 속에 들어 있는 ‘사회방서(四會訪序)’의 내용이다. 이를 통해 초의가 1842년 완성서관으로 운암을 찾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초의가 금강산을 찾았던 것은 이미 1838년의 일인데도 몇 년이 흐른 뒤에도 금강산 유람의 재미난 여행담을 얘기하는 대목이 이채롭다. 특히 금강산의 승경 얘기를 듣다가 코를 골며 잠이 드는 정황에 대한 묘사는 절묘한 그의 글 솜씨가 빛을 발한 셈이다. 서로 먼저 운을 불러보라는 이들의 겸양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 당대 최고의 명필 창암 이삼만은 초의 스님이 참여한 시회(詩會)에 참여한 뒤 스님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진은 창암의 친필 시고.

 


한편 초의는 왜 완성서관으로 운암을 찾았을까. 이 무렵 초의가 처한 현실적인 상황은 암울하였다. 적거지로 떠나는 추사가 일지암을 찾은 것은 1840년의 일이다. 추사를 전별하기 위해 완도까지 따라 나섰던 초의였다. 불망지교(不忘之交)를 나누던 정든 벗이 영어(囹圄)의 몸이 된 현실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그는 1842년 운암을 찾아 나섰고, 이듬해인 1843(癸卯)년에 태가 묻힌 고향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더구나 운암이 초의를 만났을 때의 감격을 “초의가 석장을 잡고 만중산으로부터 왔네. 손을 잡으니 모두 꿈만 같아라(草衣扶錫杖 來自萬重山 握手渾如夢)”고 하였으니 운암과 초의가 얼마나 막역한 사이인지를 짐작하기에 족하다.


특히 이들의 모임에 차가 등장되었던 사실은 초의의 시에 드러난다. 분명 운암이 도가의 양생술에 밝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차를 애호했음직하다. 이 시축에 수록된 초의의 시에 “차향이 자리에 가득, 돌아감을 잊었네(茶香滿例坐忘歸)”라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모임에 분명 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기로운 차는 뜻이 맞는 이들에게 더 없이 좋은 소통의 창구. 이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는데 ‘사회운봉창암거사(四會韻逢蒼巖居士)’라는 또 다른 시제(詩題)에는 이튿날에 창암까지 와서 이 모임에 합세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사회(四會)는 운암과 초의, 오하사, 김석누를 이르는 것이고, 시제는 바로 “네 사람의 시회에서 창암거사를 만났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시 창암은 이 시회에서 돌아가 초의에게 ‘증별남해승초의(贈別南海僧草衣)’를 보냈는데 올 1월 “명선 초의전”에 창암의 친필 시고가 소개되어 확실한 증거 자료가 제공된 셈이다.

 

“차향에 돌아갈 길 잊었네”
용정차 마시며 밤새워 담론

오하사·김석누 등도 동참
승속·귀천 뛰어넘은 모임


한편 고향을 찾아 갔다가 대둔사로 돌아 온 초의는 1843(癸卯)년 10월에 ‘차운엄도인운(次雲广道人韻)’ 8수를 지어 운암에게 보냈다. 이 시 첫 수(首)의 구(句)에 “삼년이나 아름다운 모임, 겨울에 있었는데 싸락눈 흩날릴 제 또 여기서 만났네(三年佳會在玄冬 霰雪霏霏又此逢)”라 하였으니 이들의 모임은 이미 3년 전부터 지속된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 시의 제 5수(首)에는 초의가 이들에게 차를 권하는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만남의 여유, 지난 겨울보다 나아졌음을 느끼는 건(淸遊剩覺勝前冬)/ 고매한 사람들과 함께 만나 고요함 속에 있어서이지.(坐與高人靜裏逢)/ 지난번 지은 시, 등불 앞에서 좋은 구절을 (찾아) 뽐내는데(舊作燈前誇好句)/ 추운 겨울 밤, 멀리서 들려오는 아스라한 종소리(寒更雲外報疎鍾)/ 인간세상 요란한 건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듯하고(下方風搖樹)/ 맑고 편안한 천상세계는 산봉우리에 가득한 달빛과 같지(上界淸寧月滿峰)/ 신령한 샘물이 호락보다 좋다는 건(要試靈泉勝牛乳)/ 용정차 한 봉지를 마셔보면 안다오.(一包龍井解斜封)


수승한 만남은 안심(安心)을 통해 전달되는 것. 지난번 지었던 시구에서 좋은 구절을 찾아 서로 뽐내는데 아스라이 들려오는 종소리, 이것은 새벽을 알리는 소리인가. 세상의 진미(珍味)는 호락을 으뜸으로 여기지만 향기로운 차 한 잔이 이보다 좋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의는 맑은 차의 정기는 사람의 마음과 몸을 정화한다는 것을 이렇게 드러낸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모임은 승속을 초월하고, 귀천을 뛰어 넘은 호남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1843(癸卯)년 가을, 초의의 고제(高弟) 범해 또한 ‘화김운옹선생(和金雲翁先生)’을 지어 오래 사제 사이에 이어온 운암과의 인연을 이렇게 노래했다.
천하에 이름 난 고매한 선비(名聞八域儒林老)/ 지팡이 잡고 거닐며 반생을 한가롭게 보내네(一杖逍遙半世閒)/ 가득 담긴 국화주에 늦도록 취해(滿甁秋酒三更醉)/ 평상에 함께 누워 옥산에 쓰러졌지(就臥同床頹玉山)


천하에서 이름난 고매한 선비 운암은 국화주에 취해 삼경(三更)을 넘겼단다. 범해와 나눈 이들의 이야기, 상천(上天)을 노니는 신선의 세계. 바로 옥산(玉山)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 선경에 누웠다는 범해의 말은 무아(無我)의 원융한 세계를 이리 말한 것일까. 아니면 무루(無漏)나 무변(無邊)을 이르는 것인가. 소요(逍遙)는 도가의 은유, 그의 도가적 취향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운암이 초의에게 보낸 ‘운관축(雲館軸)’ 속에 수록된 ‘초의가 멀리에서 왔다(草衣遠來)’는 시는 1842(壬寅)년 11월11일에 지은 것인데 자신을 운엄노인(雲广老人)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당시 그의 나이는 오륙십이 넘은 듯하다.

▲ 박동춘 소장

이무렵 초의의 세수(歲數)도 이미 오십을 넘어 이순(耳順)에 가까웠던 시기이다. 따라서 운암은 초의와 동년배이거나 몇 살 손위에 인물은 아니었을까. 이들이 나눈 속 깊은 정이 부럽기만 하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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