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과 지혜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선정과 지혜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 법보신문
  • 승인 2011.06.2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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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내제된 보리반야의 현현
언제나 곧은 마음이 바로 일행삼매
도는 머물지 않고 항상 흘러야한다

 

▲ 혜능 스님이 금강경을 듣고 출가했던 오조사. 혜능 스님의 게송을 담은 편액이 걸려있다.

 

 

7. 정혜(定慧)


혜능이 이곳에 와서 머무른 것은 모든 관료·도교인·속인들과 더불어 오랜 전생부터 많은 인연이 있어서이다. 가르침은 옛 성인이 전하신 바요 혜능 스스로 안 것이 아니니, 옛 성인의 가르침 듣기를 원하는 이는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깨끗이 하여, 듣고 나서 스스로 미혹함을 없애어 옛 사람들의 깨침과 같기를 바랄지니라. 혜능 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惠能來依(衣)此地 與諸官僚(奪)道俗 亦有累劫之因 敎是先聖(性)所傳 不是惠能自知 願聞先聖(性)敎者 各須淨心聞了 願自除(餘)迷 如(於)先代悟下是法 惠能大師喚言 善智識 菩提般若之智(知) 世人本自有之 卽緣心迷 不能自悟 須求大善知識示導(道)見性 善知識 遇悟卽成智 善知識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惠定別 定惠體一不二 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時 定在惠 卽定之時惠在定) 


우리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했을 때 그것은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돼 있는 보리반야가 현현하는 것입니다. 보리반야는 불성, 또는 부처라고 할 수 있는데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 등 삼독(三毒)에 의해 인해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중생심이 걷히게 나면 내재돼 있던 보리반야는 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선지식은 훌륭한 스승을 말합니다. 수행은 홀로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하면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돼 있던 보리반야가 현현하게 됩니다. 반야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은 정(定)과 혜(慧)를 통해서입니다. 정과 혜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선정은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경전에는 일찰나(一刹那)에 구백 번 생겼다 소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선정은 쉼 없이 생멸을 반복하는 이런 마음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해 지면 밝음은 절로 드러납니다. 간혹 우리는 누구와 다툴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시비(是非)를 제대로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천천히 살펴보면 다툼의 전후 사정이 명확히 보이게 됩니다. 여기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는 선정이고 그 결과 전후사정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지혜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선정과 지혜는 함께 합니다. 거울에 때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거울을 닦아야 합니다. 여기서 닦는 행위는 선정입니다. 그리고 닦아서 깨끗해진 거울에 사물이 비치는 것은 지혜입니다. 거울은 닦은 만큼 비치게 되고 비친 만큼 닦인 것입니다. 그래서 닦는 행위와 비치는 정도는 항상 함께 합니다. 정과 혜가 함께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스스로 깨쳐 수행함은 입으로는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의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善知識 此義卽是<定>惠等 學道之人作意 莫言先定發惠 先惠發定 定惠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 口說善 心不善 惠定不等 心口俱善 內外一[衆]種 定惠卽等 自悟修行 不在口諍 若諍先後 卽是<迷>人 不斷勝負 却生法我 不離四相) 


일상이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일상이 돼야 합니다. 절에서는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절 밖에서는 주변 사람들과 수시로 다툰다면 어찌 참된 불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정과 혜가 둘이 아니듯 삶과 수행이 또한 둘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선정이 먼저다 지혜가 먼저다 다투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은 투쟁심을 끊지 못한 것으로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됩니다. 


일행삼매란 일상시에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정명경’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요 곧은 마음이 정토다’라고 하였느니라.(一行三昧者 於一切時中 行住坐(座)臥 常行直(眞眞)心是 淨名經云 直(眞)心是道場 直(眞)心是淨土) 


일행삼매란 일상이 항상 삼매의 연속이라는 의미입니다. 밥을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늘 맑은 마음의 상태가 유지돼야 합니다. 항상 올바른 마음이 유지되면 이것이 바로 일행삼매입니다. 이렇게 항상 곧고 바른 마음이 유지되는 것을 직심(直心)이라고 합니다. ‘정명경’은 유마경을 말하는데 바른 마음이 곧 도량이고 바른 마음이 곧 정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량과 정토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따라 지금 있는 그곳이 도량이며 정토가 될 수 있습니다. 염염보리심(念念菩提心) 처처안락국(處處安樂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 생각이 다 깨달은 마음이라고 한다면 곳곳이 다 극락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가지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니라. 오직 곧은 마음으로 행동하여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법의 모양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국집하여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곧은 마음이라고 하며, 망심을 제거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과 같은 것이므로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니라. (莫心行첨曲(典) 口說法直 口說一行三昧 不行直(眞)心 非佛弟子 단行直(眞)心 於一切法無[上]有執著 名一行三昧 迷人著法相 執一行三昧 直(眞)心坐不動 除妄不起心 卽是一行三昧 若如是 此法同無情(淸) 却是障道因緣) 


앉아 있는 것이 곧 수행은 아닙니다. 만약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이라면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가 될 것입니다. 수행은 앉거나 서거나 관계가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수행은 또 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아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는 것이 직심(直心)입니다. 나라는 아집과 편협함을 버리고 명료하고 밝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직심입니다. 직심이 곧 일행삼매입니다. 일행삼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정과 지혜가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모양이나 형태, 어떤 수행 기법 등을 고집한다면 참다운 진리와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어찌 도리어 정체할 것인가?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곧 통하여 흐르는 것이요, 머물러 있으면 곧 속박된 것이니라.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속에 편안히 앉아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느니라.(道須(順)通流 何以却滯 心<不>住在卽通流 住卽被(彼)縛 若坐不動 是維摩詰 不合呵舍利弗 宴坐(座)林中) 


진리는 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고여 있으면 섞게 됩니다. 만약 진리로 인해 꽉 막혀 있다면 이 또한 속박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등비구(汝等比丘) 지아설법여벌유자(知我說法如筏喩者) 법상응사(法尙應捨) 하황비법(何況非法). 풀이하면 너희 비구들아 내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은 줄 알아라. 법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법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일명 뗏목의 비유입니다. 뗏목은 강은 건너기 위한 수단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스님들의 말씀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입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이 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유마힐은 유마 거사입니다. 유마 거사는 부처님 10대 제자 중 지혜제일인 사리불이 늘 숲속에서 혼자 수행하고 있는 것을 힐난합니다. 숲 속에서 혼자 수행하면 스스로는 편할지 모르지만 고통에 젖어 있는 중생 구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물었던 것입니다. 진리는 흘러야 하고 또한 소통돼야 합니다. 


선지식들아, 또한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짐짓 알아야 한다.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善知識 又見有人 敎人坐(座) 看心看淨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不悟 便執成顚 卽有數百般(盤) 如此敎道者 故知(之)大錯 善知識 定惠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知)體 光是燈之用 <名>卽有二 體無兩般 此定惠法 亦復如是)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수행은 아닙니다. 일상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 바탕에는 물론 직심(直心)이 있어야 합니다. 곧고 바르고 옳은 마음, 맑고 밝은 마음, 자비롭고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선정과 지혜는 촛불과 같습니다. 초가 선정이고 불이 지혜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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