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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행은 바른 성품 위에 각양각색 꽃 피우는 것

기자명 법보신문

그림 그리기 전 비단이 순수 마음이라면
아름다운 색으로 그려진 꽃은 보살의 행
보살의 만행을 비단의 꽃에 비유한 뜻은
아름다운 삶의 빛깔을 드러내기 위한 것

 

▲ 돈황 막고굴 220굴. 당나라 초기 작품으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13명의 천인, 보살, 비천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87. 화엄종의 열 가지 걸림 없는 법


華嚴宗有十種無礙. 今於事法上 辯此十無礙 例餘法准知. 一 性相無礙者 如經云 此蓮華葉卽具此十義 謂此華葉卽同眞性 不礙事相宛然. 二 廣狹無礙 卽此華葉其必普周無有邊際 而恆不捨本位分劑. 此則分卽無分 無分卽分 經云 此諸華葉普覆法界. 三 一多無礙 卽此華葉 具無邊德 不可言一 融無二相 不可言多. 四 相入無疑 此一華葉舒已 遍入一切差別法中 復能攝取彼一切法 令入己內 是故 卽舒恆攝 同時無礙. 五 相卽無礙 此一華葉 必廢己同他 擧體全是彼一切法 而恆攝他同己 令彼一切 卽是己體. 是故 己卽是他 己不立 他卽是己 他不存 他己存亡 同時顯現. 六 隱顯無礙 此華葉旣遍一切 彼一切法 亦皆普遍. 此能遍彼 則此顯彼隱 彼能遍此 則彼顯此隱. 如是此彼 各有隱顯無礙. 七 微細無礙 又 此華葉中 悉能顯現微細刹土 炳然齊現 無不具足. 經云 一塵中 微細國土 曠然安住. 八 帝網無礙 又 此華葉一一塵中 各有無邊諸世界海 世界海中復有微塵 此微塵內 復有世界. 如是重重不可窮盡 非是心識思量境界. 九 十世無礙 此一華葉 橫遍十方 豎該九世. 以時無別體 依華以立 華旣無礙 時亦如之. 十 主伴無礙 又 此華葉理無孤起 必攝無量眷屬圍繞. 經云 此蓮華有世界海微塵數蓮華 以爲眷屬 此經所有眷屬 互爲主伴 具德圓滿.


화엄종의 열 가지 걸림 없는 법이 있다. 지금 연꽃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하니 대부분 나머지 법도 이 비유를 본보기로 삼아 알 수 있다.


1. ‘참성품’과 ‘드러난 모습’에 서로 걸림이 없다는 ‘성상무애(性相無碍)’는, 경에서 “연꽃이 그 모습 그대로 이 열 가지 걸림 없는 법을 다 갖추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는 연꽃 그대로 ‘참성품’이므로 이 성품이 연꽃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남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2. 넓고 좁은 공간이 서로 걸림이 없다는 ‘광협무애(廣狹無碍)’는, 연꽃 한 송이가 마땅히 끝없는 법계에 두루 하니 언제나 ‘본디 자리’와 ‘그 모습’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나눔’이 곧 ‘나눔이 없는 것’이고 ‘나눔이 없는 것’이 곧 ‘나눔’이니, 이를 경에서 “모든 연꽃이 두루 법계를 덮는다.”라고 한다.

3. ‘일(一)’과 ‘다(多)’에 서로 걸림이 없다는 ‘일다무애一多無碍’는, 연꽃의 그 모습이 끝없는 공덕을 다 갖추고 있으니 ‘하나’라 할 수 없고, 연꽃의 그 ‘참성품’이 원융하여 다른 모습이 없으므로 많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4. 서로 들어감에 걸림이 없다는 ‘상입무애(相入無碍)’는, 한 연꽃이 펼쳐지면 온갖 모습 속에 두루 들어가면서 다시 그 온갖 모습을 자기 안에 거두니, 이 때문에 법을 펼치면서 항상 거둠이 동시라서 서로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5. 서로 하나 됨에 걸림이 없다는 ‘상즉무애(相卽無碍)’는 한 연꽃이 반드시 ‘자기’를 버리면 ‘남’과 같아지니, 그 바탕 전체가 온갖 법이면서 언제나 온갖 법을 거두어 ‘자기’와 같아져 온갖 법이 곧 ‘자기’의 바탕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가 곧 남’이기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이 곧 자기’라 ‘남’이라 차별하지 않으니 ‘나와 남의 존망’이 동시에 드러난다.

6. 숨고 나타남에 서로 걸림이 없다는 ‘은현무애(隱顯無碍)’는 연꽃이 온갖 법에 두루 하고 온갖 법 또한 모든 곳에 널리 두루 한다는 것이다. 연꽃이 온갖 법에 두루 하다면 연꽃은 드러나며 온갖 법은 숨고, 온갖 법이 연꽃에 두루 하다면 온갖 법은 드러나고 연꽃은 숨으니, 이처럼 피차 저마다가 숨고 나타남에 서로 걸림이 없다.

7.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도 서로 걸림이 없다는 ‘미세무애微細無碍)’는 또 연꽃에 아주 미세한 국토까지 분명하게 다 드러나 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하나의 티끌 가운데 미세한 국토까지도 환하게 안주한다.”라고 말한다.
8. 제석천 그물의 투명한 구슬처럼 서로 상대방을 끝없이 감싸 들이는 ‘제망무애帝網無碍)’는, 또 이 연꽃의 티끌 하나하나마다에 끝없는 온갖 세계가 들어있고, 이 온갖 세계 가운데 다시 미세한 티끌들이 있는데 이 티끌 안에 다시 온갖 세계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듭거듭 되풀이되어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이는 중생의 알음알이로 생각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9. 한 생각에 과거 현재 미래가 전부 있어 서로 걸림이
없는 ‘십세무애十世無碍)’는, 한 연꽃이 공간으로 시방세계에 두루 하고 시간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감싸 들이는 것을 말한다. 시간은 다른 실체가 없어 공간에 의지하여 세워지기에 공간에 이미 걸림이 없다면 시간도 이와 같다.

10. 주연과 조연이 서로 걸림이 없다는 ‘주반무애主伴無碍)’는, 또 연꽃은 본래 그 이치가 홀로 존재하는 법이 없고 반드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권속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경에서 “이 연꽃에 온갖 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꽃이 있어 그것으로 자기 권속을 삼는다.”라고 하니, 이 경의 모든 권속이 서로 주연이 되고 조연이 되어 덕을 갖춤이 오롯하다.


강설) 원문에서 말하는 ‘사법事法’이란 ‘법계의 참성품’이 ‘연꽃으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88. 비단 위에 아름다운 꽃이 그려지고


會通純雜文云 萬行紛披 比華開錦上者 意取五綵相宣 華色雖異 一一之線 皆悉通過. 通喩於純 異喩於雜. 故常通常異 名爲無礙 不同繡畫但異不通.


‘순(純) 잡(雜)을 회통하는 글‘에서 “보살의 온갖 만행을 비단 위에 그려진 꽃에 비유한 뜻은 보살의 아름다운 삶의 빛깔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꽃의 빛깔이 다르더라도 그림의 선 하나하나가 다 비단 위를 통하니, 이 비단은 ‘오롯한 도 순수’에 비유되고 꽃의 색깔이 다른 것은 ‘온갖 보살행’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비단과 꽃처럼 항상 서로 통하면서도 항상 서로 다른 모습 이를 일러 ‘걸림 없다’라고 한다. 이 비유는 수를 놓아 그린 꽃그림이 단지 비단과 그 위에 그려진 꽃이 달라 서로 통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라고 하였다.


釋曰 若異而不通 失一性圓融之道 若通而不異 無萬行莊嚴之門. 今常異常通 無間無斷則眞體冥寂不礙隨緣大用現前 無妨正性.可謂比華開錦上 猶雲起長空矣.


이를 풀이해 보자. 만약 달라서 통하지 않는다면 ‘한 성품 오롯한 도’를 잃고, 통하기만 하고 다름이 없다면 ‘온갖 보살행으로써 세상을 장식할 길’이 없다. 지금 항상 다르면서도 항상 통하여 조그마한 틈도 없다면 ‘참 고요한 바탕’이 인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막지 않아 보살의 온전한 삶이 드러나니 바른 성품을 방해할 것이 없다. 이는 비단 위에 아름다운 꽃이 그려지고 푸르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이는 것이라 할 만하다.


강설)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순수에 비유하고 그 마음에서 드러나는 온갖 보살행을 잡다함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비단이 순수한 마음이라면 온갖 아름다운 색으로 그려진 꽃은 보살행이니 마음과 그 보살행이 서로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의 마음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행으로 나타나니 그 행이 서로 다르지만 보살의 마음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에 서로 간에 걸림이 없다. 보살행에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한 성품 오롯한 도’가 되지 않을 것이요, 보살행이 한 가지뿐이라면 이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발현되지 못할 것이므로 인연의 흐름을 따라가는 보살의 온전한 삶이 드러나지 못한다. 보살이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보살행을 나토는 것이 바른 성품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기에 비단 위에 각양각색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중생의 몸 가운데 법신을 드러내고
28-4-89 三摩地經 云. 於其一切有情身中 普能示現一有情身 又 能於一有情身中 普現一切有情之身 有情身中 能現法身. 又 能於法身中 現有情身 乃至 能以一身 隨念悟入 一切衆生無際劫數 普現所作業果異熟. 隨其所應 開悟有情 悉令現見 皆得善巧.


‘적조신변삼마지경(寂照神變三摩地經)’에서 말하였다.
‘온갖 중생의 몸’ 가운데서 두루 ‘한 중생의 몸’을 보여주고, 또 ‘한 중생의 몸’ 가운데서 두루 ‘모든 중생의 몸’을 나타내며, ‘중생의 몸’ 가운데서 ‘법신’을 드러낸다. 또 ‘법신’ 가운데서 ‘중생의 몸’을 나타내고, 한 몸으로써 생각하는 대로 모든 중생에게 깨달아 들어가 모든 중생이 지은 업의 달라진 과보를 두루 나타낸다. 감응된 곳에서 중생을 깨우쳐 모든 것이 눈앞에 드러나게 하니 모두 좋은 방편을 얻는다.


강설) 제석천 그물에 달려 있는 투명한 구슬처럼 서로 상대방을 끝없이 감싸 들이는 ‘한 중생의 몸’ 가운데 두루 ‘모든 중생의 몸’을 나타내고 ‘온갖 중생의 몸’ 가운데 두루 ‘한 중생의 몸’을 보여주며, ‘중생의 몸’ 가운데 ‘법신’을 드러내고 또 ‘법신’ 가운데 ‘중생의 몸’을 나타내고 있다.

 

▲ 원순 스님

이와 같이 거듭거듭 되풀이되어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이는 중생의 알음알이로 생각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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