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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치사랑과 내리사랑, 그리고 불교윤리

기자명 법보신문

다름 인정하는 ‘중도’는 동아시아 번영 동력

 

▲ 지난 2009년에 열렸던 연꽃마을 ‘효사랑 마라톤대회’.

 

 

요즘 들어 젊은 사람과 노인의 충돌이 자주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얼마 전에도 어린아이를 만진다는 이유로 노인과 젊은 주부가 지하철 안에서 시비가 붙었다. 결국 폭력으로까지 이르렀다는 보도가 뉴스에서 방송되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패륜적이라며 무너져가는 도덕성을 개탄하기도 한다. 우리사회는 과연 문제가 있는 것인가? 패륜이란 인륜이 무너졌다는 것이니, 반인륜적이라는 의미다. 인륜이란 어떤 가치를 의미하는 것인가? 이 부분이 먼저 정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륜이나 반인륜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정권 유지 위한 유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륜이란, 유교적인 상하 수직질서를 의미한다. 예컨대, 군신·부자·부부와 같은 서열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다. 유교는 중국의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성립됐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연장자를 존중한다. 그러므로 연하자는 연장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미덕이며, 당연한 도리가 된다. 이러한 가치들이 바로 우리가 잠재적으로 사용하는 인륜의 개념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유교사회가 붕괴한 지도 100년이 넘었다. 또한 60년대 이후 관 주도의 밀어붙이기식 경제발전과 급격한 서구화로 인해, 사회구조와 가치관은 지난 1세기 동안 상상하기 힘든 변화를 보였다. 이러한 사회와 가치관 변화가 오늘날 여러 관점에서 충돌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목도하는 윤리문제의 본질이다. 즉, 우리사회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의 윤리적 잣대가 여럿 존재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중국문화는 고대문명에서부터 통치의 편리함을 위해 치사랑(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함)을 주로 강조했
다. 즉, 유교윤리의 특징은 아랫사람의 의무와 도리 강조로만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충효’라는 가치를 통해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충효의 덕목에서 임금의 의무와 부모의 자애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러한 문화구조는 오늘날까지도 유교문화권 위정자들의 도덕적 해이로 나타난다.  아래의 견제가 약할 수밖에 없는 도덕관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유교문화권의 가장 큰 문제점인 동시에 다분히 의도된 목적의 결과다. 중국 고대 위정자들은 아랫사람의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반란 여지를 줄이고 손쉽게 체재 안정을 꾀하려했다. 이것은 성공적이었지만 위정자들의 방종은 국가가 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주변의 이민족들에게 돌아가면서 지배를 받았으며, 조선과 같은 경우 세계최빈국 수준으로 추락했다.


만일 치사랑이 진리고 인간에게 갖추어진 본성이라면 이것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이 본성이라면, 이는 내리사랑처럼 별도의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유교는 치사랑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이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던 이유는 바로 정권 안정이었다. 이는 유교적 윤리가 진리가 아닌 특정 이익집단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준다. 다시 말해 유교윤리는 우리가 항구적으로 묵수해야하는 불변의 가치가 아니다.


오늘날까지 동아시아 국가들의 약진을 저해하는 장애물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이 정치 부패다. 이는 유교문화 한계에 대한 극복의 필연성을 우리사회에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다.

 

윤리 현대사회에선 해체 조짐


유교적 가치가 많이 남았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어른들이 어린아이의 고추(성기)를 만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오늘날 아이가 예쁘다고 뽀뽀 한 번 했다가 아동성추행범으로 몰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의 윤리가 존재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지난 70~80년대 정부를 상대로 개인이 시위를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대통령을 상대로도 그것이 가능한 세상을 산다. 가치관은 불과 1세대 만에 몰라보게 변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변화들 속에서도 일관하는 가치가 있다. 집단에서 개인이라는 가치 이동이다. 어른들이 아이의 고추를 만지는 행위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그 아이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그 집단의 어린 소속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즉, 집단이 개인에 우선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행위가 성추행 관점에서 비춰지는 현상은 아이를 집단에 앞서 독립된 인격체로 판단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70~80년대 개인성의 대두는 전체적인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반역적 행위와 곧잘 통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는 다양성을 대변하는 가치라고 불린다.


경찰이 길거리에서 여성의 치마길이를 단속하고, 남성의 긴 머리카락을 즉석에서 잘랐다는 사실은 그 사회에 확고부동한 윤리적 기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사회를 하나로 규정지을 수 있는 분명한 윤리는 없다. 다양성 사회에서 가치관 충돌이 파생하는 이유이다.


인도불교는 상업을 바탕으로 흥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업적 가치에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업이란 주식시장과 같이 끊임없이 바뀌는 ‘변화의 가치’다. 이를 불교에서는 ‘무상의 비규정성’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규정되는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삼성이 영원한 승자는 아니다. 반면 동시에 현재의 승자이다. 소니는 과거의 승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승자가 아니다. 즉, 승자라는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승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의 타당성, 불교에서는 이를 ‘중도’라고 한다.


불교의 시대에 동아시아는 최상의 번영을 구가했다. 다양성을 용인하는 불교윤리 ‘중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족 왕조인 당나라는 로마를 누르고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고려에는 청자와 불화 그리고 나전칠기로 대표되는 세계 최고 명품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양성 그 자체를 균형으로 보는 화엄철학의 결과이기도 했다.

 

▲ 자현 스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어른의 미덕이었던 가치가 우리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모욕으로 여기는 문화도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다. 윤리란 인간 안에서 새로운 기준에 의한 시대적 타당성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는 하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다양한 가치관을 요구한다. 젊은이와 어른은 동시에 변해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회의 문제이며 쌍방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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