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을 떠난 순수한 상태가 무념이다
분별을 떠난 순수한 상태가 무념이다
  • 법보신문
  • 승인 2011.07.1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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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 깨침 차이 없어
깨침의 선후는 사람의 근기 따라 생겨나
고정된 실체 없으니 머물지 않아야 열반

 

▲오조사 방앗간에 모셔진 혜능 스님 상.

 

 

8. 무념(無念)


선지식들아, 법에는 단박 깨침과 점차로 깨침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이는 단박에 닦느니라.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본래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깨달으면 원래로 차별이 없으나 깨닫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윤회하느니라.(善知識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卽漸契 悟人頓修 識自本心 是見本性 悟卽元無差別 不悟卽長劫輪廻)


무념(無念)이라는 말은 혜능 스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무념과 더불어 무상(無相), 무주(無住) 이 세 가지 개념을 잘 기억하면서 단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진리에는 바로 깨닫는 것과 조금씩 깨달아 가는 차이가 없습니다.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차이가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런 차이는 어디서 오느냐. 사람의 근기에서 옵니다. 사람에 따라 우둔한 사람도 있고 영리한 사람도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 자체에는 단박에 깨닫고 조금씩 깨닫는 차이가 없지만 사람의 근기에 따라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로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은 단박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혜능 스님은 천재에 속합니다. 이런 분은 진리를 듣는 순간 바로 깨우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둔합니다. 그래서 노력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봉사하고 희생하고 기도하고 참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조금씩 진리에 계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은 본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본래 성품이 부처님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처와 차별이 있지 않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습기가 내 안에 내재된 불성의 발현을 막습니다. 그런 까닭에 축생의 업도 짓고 아귀, 아수라, 지옥, 천당, 인간의 업을 지어 끊임없이 육도를 윤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예부터 모두가 생각 없음(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머무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 없다고 하는가?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다. 생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다음의 생각이 생각생각 이어져 끊어짐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 끊어지면 법신이 곧 육신을 떠나느니라.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 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으로 근본을 삼느니라.(善知識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皆立 無念爲宗 武相爲體 無住爲本 何名無相 無相者 於相而離相 無念者 於念而不念 無住者 爲人本性 念念不住 前念今念後念 念念相續 無有斷絶 若一念斷絶 法身卽是離色身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爲本)


생각 없음을 무념(無念)이라고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있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망상(妄想)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바깥 경계에 끌려 다닙니다. 감각 기관인 육근을 통해 대상에 집착합니다. 그럼으로 인해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감정이 일어납니다. 무념은 이런 것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의 분별을 떠난 것이 무념입니다. 혜능 스님은 무념을 으뜸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몸으로 삼고 무주(無住)를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상을 모양이 없음이라고 했는데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재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든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고정관념으로 사물을 대합니다. 그래서 분쟁이 발생합니다. 생각에 있어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앞서 설명 드렸듯이 죽은 사람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는 명징하게 맑아 있는 것입니다. 가을 호수처럼 맑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비와 분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내면이 한없이 맑아서 감각기관에 휩쓸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무념입니다. 흔히 과거, 현재, 미래를 삼세(三世)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삼세는 무엇을 바탕으로 생깁니까. 현재의 한 생각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지금의 생각이 확대돼 과거, 현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확대됐을 때 시방(十方)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지금 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과거, 미래가 달라지겠습니까. 지금 현재 한 생각이 옳지 않다면 과거도 미래도 옳을 수 없습니다. 무주(無住)는 어디에도 집착하여 안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매이는 순간 속박(束縛)이 됩니다. 혜능 스님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머무름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도, 혹은 진리라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고정된 어떤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나를 구속하는 도구가 됩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미혹한 나를 밝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선지식들아, 밖으로 모든 모양을 여의는 것이 모양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모양을 여의기만 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없는 것으로 본체를 삼느니라.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하나니, 자기의 생각 위에서 경계를 떠나고 법에 대하여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니라. 일백 가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서 생각을 모두 제거하지 말라. 한 생각 끊어지면 곧 다른 곳에서 남(生)을 받게 되느니라. 도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써서 법의 뜻을 쉬도록 하라. 자기의 잘못은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는가. 미혹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또한 경전의 법을 비방하나니, 그러므로 생각 없음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곧 삿된 견해를 일으키므로 그것을 반연하여 모든 번뇌와 망령된 생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善知識 外離一切相 是無相 但能離相 性體淸淨 是以無相爲體 於一切境上不染 名爲無念 於自念上離境 不於法上念生 莫百物不思 念盡除却 一念斷卽 別處受生 學道者用心 莫不息法意 自錯尙可 更勸他人迷 不自見 又謗經法 是以立無念爲宗 卽緣迷人於境上有念 念上便起邪見 一切塵勞妄念 從此而生)


모양을 여의는 것은 바깥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말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바깥 상황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밖의 상황에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내 안의 불성은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밖을 향해 무언가를 찾고 얻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진리와 법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깨닫고 나면 진리라도 버려야한다는 뜻입니다.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기도와 참선을 하는 것은 이런 생각을 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맑고 편안한 마음이 유지됩니다. 대상에 이끌리지 않고 안에서도 기별하는 마음이 쉬어지는 것, 그것이 열반입니다.
열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이고 이뤄야 할 목표입니다. 수행한다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현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기도와 수행을 통해 항상 무념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혜능 스님과 같은 근기를 타고 났다면 한 순간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순간 밝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기가 그와 같지 못해서 꾸준히 수행해 조금씩 맑아지고 나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無念)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세상 사람이 견해를 여의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서, 만약 생각함이 없으면 생각 없음도 또한 서지 않느니라.
없다함은 두 모양의 번뇌를 떠난 것이고, 생각함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진여는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성품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아서 항상 자재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다’하였느니라.(然此敎門立無念爲宗 世人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亦不立 無者無何事 念者念何物 無者離二相諸塵勞 念者念眞如本性 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自性起念 雖卽見聞覺知 不染萬境 而常自在 維摩經云 外能善分別諸法相 內於第一義而不動)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흔히 알고 있는 생각의 실체입니다. 그것을 떠나서 생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견문각지(見聞覺知)라고 합니다. 이런 분별을 떠난 순수한 상태가 무념입니다. 견문각지를 떠나서 마음을 놓아두는 것, 그것이 무념입니다. 또 두 모양이라는 것은 분별을 뜻합니다. 우리는 밖의 모습을 보면서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떠난 것이 무상입니다. 만약 안경이 있다고 할 때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는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기분 상태에 따라, 과거 기억에 따라, 또 좋아하는 모양이나 색깔에 따라 분별이 생깁니다. 분별이나 상대적인 것을 떠나서 생각하는 것은 진여의 본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여는 나의 참 모습이고 여러 가지 생각들은 나의 참 모습의 작용입니다.

 

▲종광 스님
생각이 나의 참 모습의 작용임을 안다면 대상은 그저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을 분별하는 것은 나입니다. 대상은 본래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생각마다 진여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면 생각이 일어도 각종 현상에 얽매이지 않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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