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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창암과 만소

기자명 법보신문

구름과 달벗 함께 있으니 맑은 바람 적멸을 깨우네

창암은 호남칠우 중 한명
1830년부터 초의와 교유

10여년 뒤 운암집서 상봉
“초의는 벽나의 입은 신선”

 

 

▲ 칠순을 넘겨 초의 스님을 만난 창암 이삼만은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해보지만 이미 늙어버린 그이기에 재회의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사진은 전주 창암의 집터.  도서출판 동아시아 제공

 

 

초의 스님이 불후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1770~1845)을 만난 것은 1830년경의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암이 지은 ‘증별남해승초의(贈別南海僧草衣)’의 서문을 통해 확인된다.


초의 스님은 호남칠우(湖南七友) 중에 한 분이시다. 일곱 사람들 중에 네 분은 돌아가셨고, 오직 나와 초의, 운와(운암 김각의 별호)만이 남았다. 십여 년 전에 운와와 만나는 자리에서(초의를) 만났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서로 통하는 정이 미흡했지만 늙은 내가 이별하면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 감회를 다만 이 시로 표한다(草衣曾是七友中一也 七去其四 惟俺及草衣雲臥在焉 十餘年得見於雲臥席上 情誼未洽旋歸故山 白首臨別 復期難保 因感惟一絶)

 

초의는 벽나의를 즐겨 입는 신선인 듯(草衣肯似碧蘿衣)/ 구름에 가린 청산, 사립문을 여누나(雲掩靑山釋子扉)/ 우연히 얻은 좋은 인연, 내가 와서 머물었기 때문인데(偶得眞緣來我宿)/ 어찌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는가(如何還道故山歸)

 

▲'일지암시고'에 실린 창암의 시(좌), 초의 스님의 답시(우)

이 시는 1842(壬寅)년 겨울, 운암의 집에서 열린 시회에서 지은 창암의 전별시이다. 당시 운암의 집을 찾은 초의의 풍문을 듣고 모인 호남의 문사들은 운암의 설홍루(雪鴻樓)에 모여 시회를 열었고, 뜻이 맞는 이들의 고상한 풍류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창암이 이 시회에서 초의를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다. 당시 운암의 집을 방문했던 그는 초의가 여기에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이튿날 고향으로 떠나는 초의에게 ‘증별남해승초의(贈別南海僧草衣)’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을 대신한다.

 

그는 이 시의 서문에서 “십여 년 전에 운와와 만난 자리에서 (초의를) 만났다(十餘年得見於雲臥席上)”고 한 그의 증언은 이들의 교유시기가 1830년경의 일이었고, 운암과 만나는 자리에서 초의를 처음 만났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히는 단서가 되었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이들의 교유 시기는 대략 1839년 전후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했다. 이는 ‘일지암시고’에 수록된 ‘1839(乙亥)년 입동 날, 전의를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했고, 또한 만소도 멀리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전운(前韻)을 차운(次韻)하여 창암(이삼만)에게 두고 옴(立冬日訪全醫不遇又聞晩蘇亦出遊未還遂次前韻留題蒼巖而歸)’이라는 시와 이 해 가을에 지은 ‘만소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비 내리는 밤, 창암의 집에서 머물렀다(訪晩蘇不遇留宿蒼巖夜雨)’고 한 초의의 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서문의 발굴로 인해 이들의 교유시기가 9년 쯤 앞당겨졌고, 1843(癸卯)년 초의가 고향을 방문하기에 앞서 운암을 찾아갔던 사실도 함께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해보지만 이미 늙어버린 그이기에 재회의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는 고백은 세월의 무상함은 드러내기에 족하다. 그의 나이, 이미 72세,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1845년 그는 유명을 달리했으니 초의와 헤어진 지 삼년만의 일이다.


 

▲ 창암이 자신의 집 근처 바위에 새긴 글씨.  

 

 

한편 초의의 시제(詩題)에 언급된 만소(晩蘇)는 초의와 교유의 정이 깊었던 유학자이다. 그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초의의 ‘일지암시고’에 그에 관한 내력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만소는 호중사람이다. 진사에 합격했다. 항상 한양에서 노닐며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1842) 나주 책실(冊室)에 살며 이 산의 가을 경치를 즐기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일지암까지 오게 되었다(晩蘇湖中人 登進士 常遊京洛 以文章名世 時居羅州冊室 欲賞此山秋景而來轉至艸庵)

 

만소는 충청 출신 유학자
시와 불교에도 깊은 조예

초의와 “법거량하자” 의기
원융한 초의 시에 빛 잃어


만소는 이희(李曦)의 호로, 호중(湖中) 사람이다. 호중은 충청북도 제천시의 의림지 서쪽을 가리키고, 혹자는 전라북도 김제의 벽골제 오른쪽 지역이라고도 한다. 바로 충청도를 일컫는 말이니 그의 출신지는 충청도가 분명하다.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문재가 뛰어났던 사람이었다. 초의와 상당한 교분을 나누었던 인물로, 그의 시에 화운한 초의 시가 여러 편 남아 있다. 특히 창암과 가까웠다. ‘일지암시고’에 그의 문재를 살펴 볼 수 있는 시 한 편이 남아 있다.


뭉실뭉실 고갯마루 위에 흰 구름(嶺上雲)/ 숲 사이 밝은 달 교교하구나(皎皎林間月)/ 스님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는가(上人作何想)/ 생각이 일자 곧 일어났다 사라지네(有想便起滅)/ 만약 무상처를 이른다면(若說無想處)/ 희미한 구름과 달이 부질없고(雲月空依依)/ 구름이 흩어지면 달 또한 떨어진다네(雲去月亦墮)/ 담담한 초의여(蕭然一草衣)/ 내 그대에게 묻노니(我問草衣師)/ 이것이 참임을 인정하겠는가(認此爲眞)/ 하늘에 소리개 날고, 연못에 물고기 뛰는 오묘한 이치(上下鳶魚妙)/ 모름지기 저것과 내가 하나임을 알아야지(須看物亦我)/ 어느 때 한 등불 아래에서(何時一燈下)/ 서로 옳고 그름을 증명할까나(相與證否可)


만소가 말한 순리의 자연 이치, 그 경계가 의연해보이지만 피차가 하나에서 나옴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유자(儒者)의 한계인가. “한 등불아래에서 옳고 그름을 증명하자던” 만소의 의기는 일미(一味)의 원융한 경지, 한 뜻으로 내 보인 초의의 시한 수에 그 빛을 잃었다.

한 칸의 초가집에 반 칸은 구름(一間茅屋半間雲)/ 두 벗이 서로 찾아오니 하나는 달이라(二友相尋一是月)/ 구름 이웃과 달 벗이 서로 함께 있으니(雲隣相將月友居)/ 때때로 청풍이 불어와 적멸을 깨운다(淸風時來寂滅)/ 역역한 밝음이야 형체는 없어도(歷歷孤明勿形段)/ 원래부터 저것에 함께 의지하였지(生來與伊爲所依)/ 맑게 씻긴 허공은 마음의 눈이고(淸灑灑空心中眼)/ 흐드러진 붉은 낙조 몸을 덮는 옷이라네(赤條條落體上衣)/ 내외중간 구해도 다 없지만(內外中間覓總無)/ 무중(無中)에 큰 것, 이것이 무엇인고(無中大有是甚)/ 위아래로 손을 나누어 손꼽아보니(分手上下曾指出)/ 물건마다 모두 존귀한 나 있다네(物物上具獨尊我)/ 만일 그대가 이런 나를 안다면(若人理會這般我)/ 그대에게 무가(無可)와 가(可)를 허락하리(許君無可無不可)


청렴의 정도야 초옥 한 칸으로도 빛나지만 맑은 바람과 구름, 달을 의인화해 벗으로 삼았던 초의의 걸림 없는 경계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구름과 달을 벗하고 부동의 삼매를 깨우는 것이 청풍이라니 맑게 씻긴 허공을 마음의 눈으로 삼았던 초의의 본생심은 정말 닦을 것도 없는 것이었나 보다.

 

박동춘 소장

아! 무중(無中)에 큰 것, 이것은 무엇인가. 유아독존(唯我獨尊)을 말했던 초의와 자연의 순리를 드러낸 만소의 법거량은 무게부터가 다른 것. 짐짓 “그대가 이런 나를 안다면 무가와 가를 허락한다던” 초의의 희언(戱言)은 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각자(覺者)였는지도 모른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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