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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없이 바로 알아야 법계에 들어갈 수 있다

기자명 법보신문

앎이 부처님 영역에 있으면
뭇 중생들 살릴 수 있지만
앎이 중생의 영역에 있으면
일체의 삶들을 죽일 수 있다

 

 

▲ 돈황 막고굴 285굴 공양보살군상. 서위시대.

 


90. 밝은 태양 아래 외로운 등불


此重玄門 名言路絶 隨智所演 以廣見聞 唯證方知 非情所解. 若親證時 悉是現量之境 處處入法界 念念見遮那. 若但隨文義所解 只是陰識依通 當逆順境時 還成滯礙. 遇差別問處 皆墮疑情 如鹽官和尙 勘講華嚴大師云 華嚴經有幾種法界. 對云 略而言之 有十種法界 廣而言之 重重無盡. 師豎起拂子云 是第幾種法界. 當時 低頭擬祇對次 師訶云 思而知 慮而解 是鬼家活計. 日下孤燈 果然失照出去.


‘거듭 되풀이 되는 화엄의 깊은 도리’는 개념이나 언어의 길이 끊어지니 부처님의 지혜로써 설명되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증득해야만 알 수 있지 중생의 알음알이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분별함 없이 바로 아는 경계’를 증득했다면 가는 곳마다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요 생각마다 비로자나 부처님을 보게 된다. 반대로 다만 문자의 뜻만 좇아 아는 것이라면 중생의 알음알이로는 통하겠지만 좋고 나쁜 경계를 만날 때엔 그 경계에 걸리고 만다. 이런 경우 혹 별다른 질문을 받으면 모두 의심에 떨어지리니 이는 염관 스님이 ‘화엄경’ 강사를 떠보려고 질문한 내용과 같다.


염관: ‘화엄경’에 몇 종류의 법계가 있는가? 강사: 요약하면 열 종류의 법계가 있고 자세히 다 말하자면 ‘끝없이 거듭 펼쳐지는 중중무진법계’가 있습니다. 염관: (불자를 일으켜 세우면서) 이 자리는 몇 번째 법계인가? (강사가 머리를 숙여 이리저리 생각하며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생각하고 헤아려서 아는 것은 귀신들의 꼼수니라. 밝은 태양 아래 외로운 등불! 과연 빛을 잃는구나.


강설) 하택(荷澤) 스님이 “앎(知)이란 한 글자가 묘한 온갖 이치를 드러내는 문이다”이라고 하였지만, 황룡(黃龍) 스님은 “앎(知)이란 한 글자가 온갖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우리의 ‘앎’이 부처님의 영역에 있으면 부처님의 지혜가 되어 이 지혜로 모든 중생을 살릴 수 있지만, 중생의 영역에 있다면 알음알이니 뭇 삶들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앎’이 부처님의 지혜라면 중중무진법계로서 온갖 신통 작용이 나오겠지만, 중생의 알음알이라면 염관 스님처럼 안다는 경계 하나하나가 모두 번뇌덩어리라는 의미이다. ‘허공장경(虛空藏經)’에서 “글도 마구니의 업이요, 이름과 모양도 마구니의 업이요, 부처님 말씀조차 마구니 업이다.”라고 한 것도 중생의 알음알이에서 나오는 집착을 경계하려고 한 말이다.


91. 하나를 알면 천 가지가


首楞嚴三昧經云 文殊言 若人得聞一句之法 卽解其中千萬句義 百千萬劫敷演解說 智慧辯才不可窮盡 是名多聞. 大涅槃經云 若見如來常不說法 是名具足多聞 又云 寧願少聞 多解義理 不願多聞 於義不了. 卽是入此宗鏡 一解千從 雖廣引文 只證此義. 上根一覽 已斷纖疑 中下再披 方能具信 對根故爾 非法合然.


‘수능엄삼매경’에서 문수보살이 “만약 어떤 사람이 한 구절 법을 듣고 곧 그 가운데 온갖 뜻을 알고 백천만겁 지혜로운 유창한 달변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다문(多聞)’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대열반경’에서는 “만약 여래께서 언제나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을 본다면 이를 일러 ‘다문을 다 갖춘 것’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차라리 적게 듣고 많은 이치를 알기 바라지, 많이 듣고 뜻을 모르는 것은 원치 않는다”라고도 하였다. 곧 이는 종경에 들어가 하나를 알고 천 가지 이치가 나오는 것이니, 비록 많은 글을 인용하더라도 다만 이 이치를 증명할 뿐이다. 상근기는 한 번 보면 미세한 의심까지 끊어지나 중·하근기는 여러 번 보아야 믿음을 갖출 수 있으니, 이는 근기 따라 그런 것이지 법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所以 勝天王般若經 云. 佛復告善思惟菩薩言 賢德天子 已於過去無量百千億劫 修習陀羅尼門 窮劫說法 亦無終盡. 善思惟菩薩白佛言 世尊 何等陀羅尼. 佛言 善男子 名衆法不入陀羅尼. 善男子 此陀羅尼 過諸文字 言不能入 心不能量 內外衆法 皆不可得. 善男子 無有少法能入此者 故名衆法不入陀羅尼. 何以故 此法平等 無有高下 亦無出入 無一文字從外來入 亦無一字從此法出.


그러므로 ‘승천왕반야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선사유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 ‘어진 덕의 천자’는 이미 과거 오랜 세월 다라니를 닦아 익혔기에 영원토록 법을 설하여도 끝날 때가 없느니라. 선사유: 세존이시여, 어떤 다라니입니까? 부처님: 선남자여, ‘어떤 법도 들어가지 않는 다라니’라고 한다. 선남자여, 이 다라니는 온갖 개념을 뛰어 넘은 것이기에 말로 표현 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으며 안팎의 어떤 법도 얻을 수 없느니라. 선남자여,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그 어떤 법도 없는 것을 일러 ‘어떤 법도 들어가지 않는 다라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법은 평등이며 높고 낮음이 없고, 나가고 들어옴도 없으며, 한 글자도 밖에서 들어온 것도 없고 이 법에서 나간 것도 없기 때문이다.


又 無一字住此法中 亦無文字共相見者 亦不分別法與非法. 是諸文字 說亦不減 不說無增 從本以來 無起造者 無壞滅者. 善男子 如文字 心亦如是 如心 一切法亦如是. 何以故 法離言語 亦離思量 本無生滅. 故無出入 是名衆法不入陀羅尼. 若能通達此法門者 辯才無盡 何以故 通達不斷無盡法故. 善男子 能入虛空者 則能入此陀羅尼門.


또 이 법 가운데 한 글자도 머문 것이 없고 함께 서로 마주 볼 문자도 없으며 법과 비법으로 분별하지도 않는다. 온갖 문자로 설하여도 줄어들지 않고 설하지 않아도 늘어남이 없으니 본디부터 생기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선남자여, 문자처럼 마음도 이와 같고 마음처럼 온갖 법도 이와 같다. 왜냐하면 법은 언어를 떠나고 또한 생각도 벗어나서 본디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가고 들어옴이 없는 것, 이를 일러 ‘어떤 법도 들어가지 않는 다라니’라 한다. 만약 이 법문을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변재가 끝없으니, 왜냐하면 ‘변재가 끊어지지 않고 다함이 없는 법’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허공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다라니문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강설) 여기서 말하는 ‘다문’은 그냥 법문을 많이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근본을 알고 그 근본이 인연 따라 온갖 모습을 드러내는 가르침을 알았기에 그 가르침에서 온갖 이치를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 ‘다문’을 ‘종경에 들어가 하나를 알고 천 가지 이치가 나오는 것’이라고 하며 또 ‘다라니’라고도 한다.
다라니는 ‘신주(神呪)’ ‘비밀주(秘密呪)’ ‘총지(總持)’ ‘진언(眞言)’이라고도 한다. 보통 주문이라고도 하는 다라니 안에는 모든 불보살이 사바세계 온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이 담겨 있어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뜻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 다라니의 참뜻은 아무나 함부로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다라니에 들어있는 미묘한 뜻과 신비한 힘은 말로 이루 다 설명할 수 없고 중생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신주’ 또는 ‘비밀주’라 하고, 또 온갖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으로 ‘총지(總持)’라고도 하며, 참되고 거짓 없는 말이라는 뜻으로 ‘진언’이라 하기도 한다. ‘다라니’에 담겨 있는 부처님의 뜻을 어떤 각도에서 풀이하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질 뿐 그 근본 바탕은 같다.


부처님의 공덕이 담겨 있는 다라니를 정성껏 외움으로써 이 다라니와 하나가 되는 힘을 ‘주력’이라고 한다. 이 ‘주력’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장애를 제거하여 성불할 수 있고 뜻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주력’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능엄경’에 나오는 ‘대불정능엄신주’이나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 관세음보살 진언 ‘옴 마니 반메 훔’, 법신 진언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등, 그 어떤 다라니도 그 뜻을 헤아려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 한 뜻으로 정성껏 염불하여 그 다라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라니를 외우는 것도 화두 드는 법과 비슷하다. 말길이나 뜻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다라니 속에 들어가 다라니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다라니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나’가 ‘다라니’가 되고 ‘다라니’가 ‘나’가 되어 주객(主客)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주객의 경계가 사라지니 온갖 시비 분별이 끊어지고, 시비 분별이 끊어지니 온갖 번뇌의 갈등에서 벗어난다.

 

▲원순 스님

온갖 번뇌가 사라진 텅 빈 자리에서 빛으로 충만한 부처님의 세상이 나타나니, 여기에서 부처님의 신통력이 드러난다. 이 신통력으로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전생의 업장이 빠르게 소멸되고,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전생의 무거운 업장을 단숨에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라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공덕과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 다라니는 온갖 개념을 뛰어 넘은 것이기에 말로 표현 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으며 안팎의 어떤 법도 얻을 수 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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