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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초연하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정

기자명 법보신문

경계 따라 움직이지 않고 깨끗함에도 집착 말아야
밖으로 무상, 안으로 무주 궁극적으로 무주돼야 해탈

 

▲ 중국 광동성 남화선사는 혜능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30년간 보림하며 대중들을 교화했던 곳이다. 사진은 남화선사 장경각.

 

 

9. 좌선(坐禪)


선지식들아, 이 법문 중의 좌선은 원래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느니라.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나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원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함이 허깨비와 같은 까닭에 볼 것이 없느니라. 만약 깨끗함을 본다고 말한다면 사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에도 허망한 생각으로 진여가 덮인 것이므로 허망한 생각을 여의면 성품은 본래대로 일으켜 깨끗 하느니라.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은 보지 아니하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고 하는 망상이 생기느니라.(善知識 此法門中坐禪 元不著心 亦不著淨 亦不言不動 若言看心 心元是妄 妄如幻故 無所看也 若言看淨 人性本淨 爲妄念故 蓋覆眞如 離妄念 本性淨 不見自性本淨 心起看淨 却生淨妄)


어떤 것이 좌선(坐禪)일까요. 좌선은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깨끗함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경계 따라 움직이지도 않아야 합니다. 좌선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고 가져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깨끗함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은 출가수행자들이 특별히 새겨들어야 합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든지 깨끗하다든지 고고하다든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 좌선이 아닙니다. 성품이 본래 청정한데 어디에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깨끗함에 집착하면 이것 또한 망상입니다. 오히려 수행을 그르치게 됩니다. 또 움직이지 않음도 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고요하게 앉아 있는 것이 좌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누차 이야기했듯이 만약 고요하게 앉아있는 것으로 수행의 척도를 삼는다면 하체를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가장 유리할 것입니다.


물론 자세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몸이 바르지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세가 반듯해야 수행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부차적인 요소일 뿐 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혜능 스님께서는 마음은 본래 허망한 것이며 허망한 것이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깨끗함에 집착하는 것 또한 마음의 분별일 뿐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성품은 본래 깨끗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불성은 본래 청정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중생인 까닭은 허망한 생각이 참다운 성품을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여는, 불성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합니다. 이것은 마치 맑은 하늘에 구름이 생겨서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을 덜어내어 본래의 깨끗함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참선과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은 깨끗함 그 자체인데, 그것을 모르고 자꾸 깨끗함에 집착하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깨끗한 성품을 가리는 망상이며 번뇌가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수행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우리의 탐욕을 부채질하고 욕망을 극대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단하게 기도를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의 기도 대부분은 욕망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거나, 진급을 시켜달라거나, 합격을 시켜 달라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과연 수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하면서 깨끗한 무언가를 찾거나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아만(我慢)을 갖는다면 이것 또한 수행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망상은 처소가 없다. 그러므로 본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허망된 것임을 알라. 깨끗함은 모양이 없거늘, 도리어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말하면 이러한 소견을 내는 이는 자기의 본래 성품을 가로막아 도리어 깨끗함에 묶이게 되니라.


만약 움직이지 않는 이가 모든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면 이는 자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은 자기의 몸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입만 열면 곧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나니, 도와는 어긋나 등지는 것이니라.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본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니라.(妄無處所 故知看者却是妄也 淨無形相 却立淨相 言是功夫 作此見者 障自本性 却被淨縛 若不動者 不見一切人過患 是性不動 迷人自身不動 開口卽說人是非 與道違背 看心看淨 却是障道因緣)


공부에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거짓입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기적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마른하늘에서 금덩이가 떨어지는 것이 결코 기적이 아닙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만약 깨끗한 모양을 세워서 이것을 공부라고 한다면 깨끗함이 나를 묶고 속박해 부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바깥 경계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주(無住)를 말씀드렸습니다. 무상, 무념, 무주는 수행자가 견지해야 할 세 가지 틀입니다. 바깥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안으로 항상 맑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의 허물을 보지 않고, 남의 잘못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은 본래 깨끗함 그 자체인데 깨끗함에 집착해 깨끗함을 보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망념입니다. 오히려 도를 가로막는 장애가 됩니다. 우리의 성품, 즉 진여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깨끗함에 집착하는 것 또한 분별입니다.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나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는 것이 선(禪)이니라.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定)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禪)하고 안으로 정(定)하므로 선정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유마경’에 말씀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쳐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다’하였고, ‘보살계’에 말씀하시기를 ‘본래 근원인 자성이 깨끗하다’고 하였느니라. 선지식들아, 자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보아라. 스스로 닦아 스스로 지음이 자기 성품인 법신이며, 스스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이니라.(今記汝是 此法門中何名坐禪 此法門中 一切無碍 外於一切境界上 念不起爲坐 內見本性不亂爲禪 何名爲禪定 外離相曰禪 內不亂曰定 外若有相 內性不亂 本自淨自定 只緣境觸 觸卽亂 離相不亂卽定 外離相卽禪 內不亂卽定 外禪內定 故名禪定 維摩經云 卽時豁然 還得本心 菩薩戒云 本源自性淸淨 善知識 見自性自淨 自修自作 自性法身 自行佛行 自作自成佛道)


대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되는 것이 앉음, 즉 좌(坐)입니다. 밖의 경계에 초연해 지는 것이 앉음입니다. 또 안으로는 맑고 밝음이 견지되는 것, 이것이 선(禪)입니다. 늘 맑은 상태가 유지되어 가는 것이 선입니다. 밖으로 경계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 늘 맑음이 유지되면 그것이 바로 좌선(坐禪)입니다. 아주 명쾌하고 간결합니다. 그러나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노력과 정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 이것이 공부입니다. 또 밖의 여러 가지 상황에 마음이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 선(禪)이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 즉 산란하지 않는 것이 정(定)입니다.


우리는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경(六境)을 반연(攀緣)합니다. 우리가 맛을 보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할 때 이런 감각들의 정보를 취합해 마음이 생각합니다. 마음이 생각한다고 할 때 그 마음은 무엇일까요. 유식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 laya-vijnbna)이라 말합니다. 아뢰야식은 장식(藏識)입니다. 일종의 기억 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수십 년에 걸쳐 보고 들었던 것들이 기억돼 있고, 멀게는 과거의 무수한 기억들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육근의 감각기관을 거쳐 들어온 정보들은 아뢰야식에 축적된 경험에 따라 분류되고 해석되면서 생각이 일어나게 됩니다. 누구를 안다고 했을 때 눈으로 보고 눈이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아뢰야식이 축적된 경험에 따라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정은 이런 생각의 자리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바깥의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은 무상입니다. 또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것은 무념입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걸림이 없으면 그것이 무주입니다.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남을 헐뜯는다면 어떻게 제대로 좌선을 할 수 있으며 선정에 들 수 있겠습니까.


바깥으로 모습이 없어지는 것이 선이고 안으로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정입니다. 이렇게 욕망에 물들지 않고 탐욕에 찌들지 않은 것이 본래 나의 모습이며 우리의 성품입니다. 그리하여 무상이 되고 무념이 되는 것, 이것이 선정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얻게 되는 자유로운 해탈의 경지가 무주입니다. 바깥으로 쫓아다니지 않고 안으로 명징해지면 진여는 절로 현현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마경’의 ‘즉시 그 자리에서 사리를 깨쳐서 본래 마음을 도로 되찾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본래 나에게 이미 구족해 있습니다. 밖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본래의 깨끗한 성품이, 내재된 불성이 잠시 욕망에 가려 흐리게 보일 뿐입니다. ‘보살계’의 말씀처럼 사람은 본질적으로 청정한 존재입니다. 그것이 흐려지는 것은 욕망, 즉 삼독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그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선정입니다.

 

▲종광 스님

밖으로 무상이, 안으로 무념이 돼서 궁극적으로 무주가 돼야 합니다. 내 스스로가 본래 깨끗하다는 것은 누가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사람이 더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입니다. 스스로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도 나고 우주의 주인도 나입니다. 나만이 나의 참다운 성품을 드러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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