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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상하·좌우문화, 그리고 불교의 필연성

기자명 법보신문

유일신 추구하는 독선이 인종청소 재앙 낳아

 

▲선운사 천불회도. 현재의 현겁에 출세하는 천불을 그렸다. 삼신불은 중앙 비로자나불을 비롯해 노사나불과 석가불 등 법신, 보신, 화신불이 모두 구름 속에 떠있다.

 

 

노르웨이는 실재하지만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나라와 같다. 딱히 떠오르는 인상이 없는 존재감 없는 나라 중 하나가 노르웨이다. 아마 노르웨이 국민에게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노르웨이가 갑자기 우리 일상을 파고들었다.
폭탄테러와 무차별 총기 난사를 통해 사망자만 77명이 발생한 이 사건은, 단독범행이라는 잔인함만을 놓고 본다면 9.11테러보다도 더한 감이 있다. 언론은 이를 브레이비크라는 가정환경이 파탄적이고, 폭력적인 게임에 빠져있던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데 있으며, 이는 법정에서도 전혀 죄의식 없이 템플기사단 복장으로 재판 받기를 원했다는 대목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종교전쟁은 살생의 역사


종교와 결부된 전쟁에서 승자는 패자를 도륙하고는 한다. 이는 비단 십자군 전쟁과 같이 옛 역사 속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인디언에 대한 인종청소나 2차 대전 때 나치에 의한 유대인 말살 그리고 보스니아 내전 때 인종청소 등은 살육이 우리와 결코 멀리 떨어진 과거 속에 존재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히 깨닫게 한다.


인종청소는 상대방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때 가능하다. 마치 영화나 게임에서 좀비들을 죽이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 곧 인종청소다. 그래서 인종청소 가해자들은 죄의식이 없다. 아니 죄의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다.


종교전쟁에서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셈족 종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들은 유일신이라는 ‘판단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준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존재는, 곧 인간이기를 포기한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동물과 같은 존재를 죽이는 것이자, 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이것이 인종청소가 가능한 그 종교 안에서의 특수윤리 구조다.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는 한, 그 기준과 다른 가치가 파생할 때 인간은 자신의 기준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상대를 파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 중심주의가 파생한 인류의 재앙이다.
인간평등 가치가 오늘날과 같이 전개된 것은 프랑스대혁명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평등 가치가 실제 신 아래에서 평등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을 믿는 자 안에서 평등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사랑 역시 믿는 자 안에서의 사랑일 뿐이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믿지 않는 자인 경우 이는 개종 대상이며 동시에 극복 가치가 된다.


신 아래 평등은 언뜻 보기에는 수평 가치 같다. 그러나 이는 신을 통한 수직 가치다. 그래서 기독교와 이슬람 같이 서로 유일신을 믿는, 즉 서로의 수직 가치를 가진 집단들끼리는 죽음을 불사하는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동양의 종교에서 신은 상대적이다. 불교나 유교에도 공히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신들은 유일신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구조를 통해서 명백해진다. 불교와 유교에서 판단주체는 인간이다. 그래서 중국문화권에는 인간끼리의 수평적인 차등은 있지만, 유일신이 개입되는 수직적인 차등은 없다. 서양이 상하의 수직적이라면 동양은 좌우의 수평적이며, 서양이 선악(善惡) 구조라면 동양은 호오(好惡)구조인 것이다.


‘신 아래 평등’은 갈등 불러


유럽에서 이슬람 인구는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유럽의 백인들이 험한 일을 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의 이슬람권에서 노동자들을 수입해 오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들을 현대판 노예와 같이 부려먹을 때는 좋았다. 그러나 이들이 시민권을 획득하고 2세를 낳게 되면서, 이들 역시 동일한 유럽인 권리를 가지게 된다. 이때 이들을 동일한 유럽인으로 보고 권리를 나눠 주어야할 것인가, 아니면 부당하게 국가의 부를 축내는 이교도 이슬람인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가 파생한다. 노르웨이 사건의 본질은 이러한 간극에서 불거진 것이다.


우리나라도 노르웨이 사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는 이슬람이며 종교 인구수는 이미 유교를 넘어섰다. 또한 통계에 따르면 결혼하는 10쌍 중 1쌍은 외국인과 결혼하는 다문화가정이다. 대다수 이슬람인들은 우리의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3D업종은 우리가 싫어하는 일이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산업은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70년대 중동 건설현장에 갔던 것처럼, 저개발국가인 이슬람권에서 우리에게 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들의 팽창과 관련해 충돌한 사건이 조용기 목사를 리더로 한 기독교의 이슬람채권법(스크쿠법) 반대였다. 노르웨이 사건처럼 총성이 울리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갈등과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이슬람채권법은 철저히 국익을 위해 발의된 법안이었다. 그런데 기독교계의 이슬람팽창에 대한 우려 속에 결국 무산됐다. 이 사건은 기독교가 현대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세계와 함께 우리나라도 다문화라는 조류에 거침없이 빨려들어 가고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수평 가치의 동양윤리이지, 수직 가치의 서양관점이 아니다. 차별은 노력과 능력에 의해서 존재해야지 인종이나 태생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붓다는 인간평등을 주장하며 “사람은 사는 행위의 방식에 따라서 고귀하고 천한 것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어야한다는 말이다.

 

▲자현 스님

세상은 불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윤리를 요구한다. 인간이 기준이 되는 불교에는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존재한다. 불교는 시대를 읽는 눈으로 우리사회 등불, 나아가 세계의 문화 축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인류를 위한 화해와 조화에 있어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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