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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무왕

기자명 법보신문

선왕의 유업 이어 한반도 통일하고 평화시대 견인

 

▲문무왕이 681년 56세로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유언에 따라 화장했고, 남은 유해는 가루 내어 감포 앞바다 대왕암 위에서 장사지냈다. 사진은 사적 제158호 문무대왕릉. 문화재청 제공

 

 

“나는 국운이 마침 어지럽고 전쟁의 시대를 당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반역한 자를 치고 협조하는 자를 불러들여 드디어 먼 곳과 가까운 곳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안심시켰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아비와 아들의 오래된 원한을 갚아 주었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상을 두루 주었고, 내외에 관직을 고루 나누어주었으며,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백성들을 어질고 장수하는 땅으로 이끌었다. 또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들어주니, 집집이 넉넉하고 백성들이 풍요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는 언덕과 산처럼 쌓이고 감옥은 텅 비어 풀이 무성해졌으니, 신과 인간 어디에도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할 수 있겠다.”


이는 문무왕 유조(遺詔) 중의 한 내용이다. 부왕(父王) 태종무열왕이 이루려고 했던 삼국통일의 꿈을 계승하여 이를 완성했던 문무대왕, 그는 전쟁의 시대에 살면서 마침내 평화의 시대를 열었기에 무기를 녹여 농구를 만들고 신과 인간 어디에도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히 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왕은 생각함이 깊고 멀었으며, 풍채는 뛰어나고 도량은 넓었으며 위엄은 우레와 같았다.…하시는 말씀은 규범이 되었고, 그의 용모와 행동은 본받을 만한 것이었으며, 학문은 고금에 두루 통하였다.…그는 백대의 어진 임금이셨고, 천고(千古)에 성스러운 군주이셨다.”


이는 문무대왕릉비문의 기록이다. 서당화상비문(誓幢和上碑文)에도 문무왕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문무대왕이 나라를 다스리매 일찍이 천명(天命)을 받아 임금이 되어 큰 정치를 여니, 그 공능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하늘과 땅 사이 미물인 곤충에 이르기까지 그의 덕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열왕 김춘추의 맏아들 지혜와 용맹 두루 갖춰

백제·고구려 정벌 주역 당과의 외교도 능수능란


법민(法敏)은 진평왕 48년(626)년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다. 법민은 용모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650년 6월 법민은 사신이 되어 진덕여왕이 쓴 태평송(太平頌)을 당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은 법민에게 종삼품인 태부경(太府卿)의 벼슬을 주었다. 654년 3월 법민의 아버지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 해에 법민은 파진찬으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가 이듬해 3월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 6월 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함께 백제 정벌을 위해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당군이 덕물도에 이르자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 진주, 천존 등에게 큰 배 100척에 군사를 싣고 가서 회합하게 하였다. 태자는 소정방과 의논하기를 7월10일 사비성에 함께 모이자고 하였다. 이렇게 태자 법민은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7월13일.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과 대좌평 천복(千福) 등이 법민 앞에서 항복했다.


661년 6월 태종무열왕이 돌아감에 태자 법민이 왕위에 올랐다. 곧 문무왕이다. 이 달 아직 상복도 벗기 전에 당나라에서는 평양의 당군에게 군량을 운반하도록 했다. 이 해 12월에는 남쪽의 웅진과 북쪽 평양의 당군에게 군량을 운반하는 작전을 감행해야 했다.


668년 9월21일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하고, 11월5일 문무왕은 고구려 포로로 7000명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와 다음날 6일 문무 관료와 함께 선조의 사당을 배알하고 아뢰었다.


“삼가 조상들의 뜻을 이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게 죄를 묻고 원흉들을 처단하여 국운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시여 들으소서.”


이렇게 문무왕은 선왕의 유업을 이어받아 고구려까지 평정했지만, 당나라와의 결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671년 7월26일 당의 행군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琳潤法師) 편에 편지를 보내왔다. 신라가 당을 배신했다고 힐책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문무왕은 답서를 보냈는데, 흔히 이를 답설인귀서라고 한다. 아마도 당시의 명문장가 강수가 썼을 가능성이 많은 이 글은 당당하면서도 정중하다. 674년 정월 당 고종이 조서로서 문무왕의 관직과 작위를 빼앗고 왕의 아우인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유인궤와 이근행으로 하여금 신라를 토벌하게 했다. 인문은 이를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마침내 길을 떠났다. 675년 정월 문무왕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보내고 사죄하니 고종은 왕의 관직과 작위를 회복하게 했고, 이에 김인문은 중도에서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 만약 김인문이 신라왕의 자격으로 귀국했다면 신라 내부의 혼란과 분열은 심각할 수 있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당시 문무왕의 대당외교는 현실을 감안한 적절한 것이었다.


문무왕은 신라와 당이 전쟁을 벌이는 기간에도 당과의 외교를 계속했고, 문물제도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문무왕 재위 기간 동안 견당사를 11회나 파견했다. 664년에는 성천과 구일 등 28명을 웅진부성으로 보내어 당악(唐樂)을 배우게 했고, 674년 정월 당에서 숙위하던 덕복(德福)이 역술을 배워옴에 새로운 역법을 사용하도록 했다.
문무왕대에는 김유신, 강수, 차득공 등 유능한 여러 신하들이 왕을 보좌했다.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삼촌이면서 동시에 매부였다.


김유신이 병이 나자 문무왕은 친히 가서 위문하면서 말했다.
“나에게 그대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인데, 만약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인민들은 어찌 되며 국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김유신이 말했다.


“예로부터 대를 계승하는 임금들이 처음은 잘 하다가도 끝을 맺지 못하여 대대로 내려오던 업적을 하루아침에 엎어버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그것을 확보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명념하여, 간악한 자를 멀리 하고 어진 사람에게 접근하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재앙과 환란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 위업이 무궁하게 된다면 제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문무왕에게 김유신은 참으로 중요한 존재였다.

 

강수·차득공 등 인재 활용 사찰 창건·불사 적극 지원

“나는 죽은 뒤 큰 용이 되어 불법과 나라 지킬 것” 유언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에 주로 활동한 강수(强首)는 문장으로 이름나 여러 외교문서를 썼다. 강수는 외교문서의 작성으로 문무왕을 도왔다. 김인문이 당나라의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이에 강수로 하여금 인문을 놓아달라고 하는 표문을 짓게 하여 이로써 당 황제에게 아뢰었다. 표문을 본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놓아주고 위로하며 보내 주었다고 한다. 문무왕은 강수의 공을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강수는 문장을 잘 지어 중국과 고구려와 백제에 편지로 뜻을 다 전했으므로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선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 하나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찬의 관등을 주고 봉록을 매년 200섬으로 올려 주었다.
문무왕은 어느 날 서재(庶弟)에게 재상을 부탁했다. 이에 차득공은 말했다.


“폐하께서 만약 소신으로써 재상을 삼으시려면, 심은 원컨대 국내를 몰래 다니면서 민간에서 담당하는 부역의 괴로움과 수월함, 조세의 가벼움과 무거움, 관리의 청렴함과 탐오함을 알아본 뒤에 관직을 맡겠습니다.”
차득공은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든 거사(居士)의 차림을 하고서 여러 지방을 두루 살펴본 뒤에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문무왕은 여러 고승들과도 가까이 했다. 명랑(明朗), 의상(義相), 경흥(憬興), 지의(智義) 등이 그들이다. 문무왕 10년(670) 당의 침략 소식에 접한 신라 조정에서는 고승 명랑에게 방어책을 자문했고, 그의 건의에 따라 사천왕사를 세우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문무왕은 14년(674) 9월에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는데, 그는 명랑의 형이었다. 문무왕 16년에는 의상으로 하여금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도록 했다. 문무왕은 임종 직전 태자에게 백제 출신의 경흥을 국사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다. 민족의 융합을 염두에 둔 당부였다. 문무왕은 평소에 지의법사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평소에 불법을 깊이 믿었고, 죽어 내생에도 한 마리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모시고 나라를 지키고자 염원했던 문무왕은 유언에서 당부했다.


“산과 골짜기는 변해서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아가니,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모양의 빛나는 향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이 묻힌 서릉의 망루는 단지 동작이라는 이름만이 전할뿐이다.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는 것은 책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아플 뿐이다. 이와 같은 일은 즐거이 행할 바가 아니다. 내가 죽어 열흘이 지나면 고문(庫門) 밖의 뜰에서 인도 의식에 따라서 화장하라. 상복을 입는 등급은 정해진 규정이 있거니와 상례의 제도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도록 힘써라.”


문무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681년 7월21일 56세로 돌아갔다. 신하들은 유언에 따라 화장했고, 남은 유해는 가루 내어 동해중의 큰 바위 즉 대암(大巖) 위에서 장사지냈다. 문무왕비명에는 섶을 쌓아 장사지내고…분골경진(粉骨鯨津)했다는 구절이 있다. 경진은 고래가 사는 큰 바다를, 분골은 남은 유해를 가루 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남은 한 줌의 재는 저 동해 푸른 바다에 흩어서 장사지냈던 것이다.

 

▲김상현 교수

감포 앞바다 대왕암(大王岩)은 문무왕의 장례를 모신 곳, 그러기에 천 수백 년 역사의 파도에도 의연히 대왕의 바위로 그 명예를 지켜오고 있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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