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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의상의 입당 구법

기자명 법보신문

중국의 화엄종장이 극찬한 해동의 ‘마니보주’

귀족출신으로 19세에 출가
26세 때 원효와 입당 시도

 

깨달은 원효는 신라로 귀향
의상 “죽어도 가겠다” 다짐

 

 

▲범어사 소장 의상대사 진영.  

 

 

의상(義相)은 진평왕 47년(625)에 귀족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구도적 천성이 역연했던 의상은 나이 19세에 왕경에 있는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8년 연상인 원효와 만나 함께 구도의 세월을 보내지만, 그의 가계나 스승, 그리고 국내에서의 수행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무렵 구도의 열정에 불타던 신라의 젊은 구도자들은 중국으로의 유학을 꿈꾸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용감한 젊은이는 머나먼 천축을 향하기도 하였다. 의상은 도반 원효와 함께 서쪽 중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은 입당 구법을 두 차례 시도했다. 1차의 입당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이 정탐자로 잡아 가둔 지 수십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돌아왔다고 했다. 의상의 나이 26세 때인 진덕여왕 4년(650)의 일이다. 이 무렵 한반도는 삼국이 서로 대결하며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에는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맥(濊貊)의 도적들이 횃불을 들고 야경(夜警)을 단단히 하여 구도(求道)의 도정(途程)으로 말하건대 움직이기만 하면 가시덤불이었다. 그러나 이미 산을 만들겠다는 뜻이 간절한지라 홀로 배수(背水)의 마음을 품어 어렵고 위험한 것을 꺼리지 않은 채 멀리 호랑(虎狼)의 나라로 건너갔다. 능히 상해(傷害)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어찌 양차(羊車)와 녹차(鹿車)에만 의지하겠는가? 곧장 바다에 떠서 높이 피안(彼岸)에 올랐던 것이다.


예맥은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이 글은 1차 구법의 어려움과 위험스러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길은 흔히 뱃길이 이용되었고, 고구려와 당의 국경지대인 요동을 통과하는 루트도 있었는데, 요동은 중국 대륙과 우리나라의 교통의 요지였다. 그리고 7세기 중엽의 요동은 고구려의 영토로 당의 침략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특히 의상이 입당을 시도했던 650년경의 요동은 당의 침략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기에 변경의 수비군에게 정탐자로 오인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겨우 목숨을 건져 신라로 돌아왔던 두 젊은 구도자는 10년 세월이 지나도 구법의 꿈을 접지 못했다. 문무왕 원년(661), 의상과 원효는 또 다시 구법의 길에 올랐다. 동아시아가 전쟁으로 소란하고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무너졌던 그 풍진의 시절도 이들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상이 원효와 함께 2차로 시도했던 입당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배를 타기 위해서 항구로 가던 도중에 심한 폭우를 만나 고분에서 피했는데, 이때 오도(悟道)를 체험한 선배 원효는 입당을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홀로 남은 의상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마침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빌려 타고 등주(登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등주의 해안에 도달한 의상은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의 관아에 유숙하도록 청했는데, 공양이 풍성했다.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의상의 용모가 뛰어남을 본 그 소녀는 아양을 떨면서 유혹했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바꿀 수가 없었다. 소녀는 갑자기 도심(道心)을 발해, 의상 앞에서 크나큰 원을 말했다.


“세세생생(世世生生)토록 화상(和尙)에게 귀의하여 대승을 익히고 배우며, 큰일을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단월(檀越)이 되어 필요한 생활 용품을 공급하겠습니다.”


의상은 장안(長安)을 향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장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종남산(終南山) 이 있었는데, 의상은 이 산의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602~668)의 제자가 되었다. 661년이다. 의상이 지상사로 오던 그 전날 밤에 지엄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해동(海東)에서 난 하나의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었다. 그 위에 봉의 집이 있기에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어서 광명이 멀리 비치고 있었다. 지엄은 꿈을 깬 뒤에 놀랍고도 이상하여 소제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왔다. 지엄은 의상을 특별한 예로 맞아서 조용히 말했다.


“나의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구나.”
그리고 입실(入室)을 허락했다.


신라에서 자란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중국을 덮었고, 그 나무 위에는 광명을 발하는 마니보주가 있었다는 꿈은 의상의 그릇과 인품과 학덕을 크고 빛나는 것으로 윤색하고 있다.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에게는 의상뿐만 아니라 혜효(慧曉), 박진(薄塵), 회제(懷齊), 도성(道成), 혜초(慧招), 번현지(樊玄智), 법장(法藏) 등 여러 제자가 있었다. 지엄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의상을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화엄을 가르쳤다. 당시 지엄은 이미 61세의 고령이었고 의상은 38세였다.

 

지엄 문하에서 7년간 수학
210자로 불후의 걸작 완성

 

당의 신라 침공 알리려 귀국
선묘낭자 용 되어 의상 보호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화엄을 수업하기 7년 세월, 어느 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에게 말했다.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해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총명약 10여 제를 주는 꿈을 꾸었고, 청의동자(靑衣童子)를 만나서 비결(秘訣)을 세 차례나 전해 받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를 들은 지엄이 말했다.
“세 번이나 신주(神呪)를 받았으니, 멀리서 찾아와 부지런히 수행한 응보가 나타났구나.”
이에 터득한 이치를 저술하도록 명하였다. 의상은 ‘대승장(大乘章)’ 10권을 편집해서 스승에게 그 잘못을 지적해 줄 것을 청했다. 지엄이 말했다.
“뜻은 아름답지만, 문사가 오히려 옹색하다.”
이에 물러나서 번거롭지 않게 하고 두루 통하게 한 다음 ‘입의숭현(立義崇玄)’이라 이름 했다. 지엄은 의상과 함께 불전에 나아가 원을 맺고 이를 태우면서 말하였다.
“말이 성지(聖旨)에 맞는다면, 원컨대 타지마소서.”
타고 남은 210자를 의상으로 하여금 주워 거두게 하여 간절히 서원하면서 다시금 맹렬한 불길 속에 던져 넣었으나 끝내 타지 않았다.


지엄이 찬탄하고, 그것을 엮어서 게송을 짓게 하였다. 의상이 며칠 동안 방문을 닫고서 7언 30구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법성게(法性偈)다. 껍데기는 버리고 불태워, 끝내 불에도 타지 않는 영롱한 사리와도 같은 210자로 지은 법성게는 불후의 문장임에 분명하다. 의상은 이 시를 54각의 도인(圖印)에 합쳐서 이를 법계도(法界圖)라고 하였다. 668년 7월15일의 일이었다. 이 해 9월에는 고구려가 망했고, 10월 29일에는 스승 지엄이 돌아갔다.
의상이 지상사에 있던 660년대의 종남산에는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조(祖)로써 유명한 도선(道宣, 596~667)이 정업사(淨業寺)에 살고 있었다. 의상에 비해서 29세나 연상이었던 도선은 의상이 종남산에 이르렀던 661년에 이미 60대 중반이었다. 도선이 의상을 초청해서 공양을 대접했는데, 이때 의상이 천신(天神)의 옹호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 도선은 그 도가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669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도 갈등이 시작되었다. 신라에서는 669 5월에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죄사(謝罪使)로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듬해 1월 당 고종은 김흠순의 귀국만을 허락하고, 김양도는 옥에 가두었다. 당의 신라 침략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흠순 등이 몰래 의상에게 귀국하여 조정에 이 소식을 전해주기를 권했다. 이에 의상은 670년에 서둘러 귀국했다.


의상은 귀국길에도 문등(文登)의 옛 신도 집을 방문했다. 수차의 공양과 보시에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선묘는 집에 없었다. 의상은 곧 상선(商船)을 불러 천천히 닻줄을 풀었다. 뒤늦게 소식을 안 선묘는 의상을 위하여 마련했던 법복과 모든 집기를 모아 상자에 담아서 해안으로 달려갔을 때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했다.
“나의 본래 참된 마음은 법사를 공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원하건대, 이 옷상자가 앞의 배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상자를 물결에 던졌다. 질풍이 이것을 순식간에 불어 가는데 마치 기러기 털과도 같았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 상자가 배에 들어갔다. 그녀는 다시 서원했다.
“내 몸이 변해서 큰 용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스님이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


그리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원력(願力)은 굽히기 어렵고 지성은 신을 감동시켜 그녀는 과연 용의 형상으로 변했다. 선묘화룡(善妙化龍)은 혹은 뛰고 혹은 그 배 밑에서 꿈틀거리면서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해서 저쪽 신라의 해안에 편안히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설화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허구적인 요소가 많기에. 선묘설화는 의상에게 사랑을 느낀 선묘가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도심을 발한다는 내용과 두 번이나 몸을 바꾸면서 의상의 화엄전교를 돕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설화에는 세속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한 차원 높은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되고 있다. 한 젊은 구도자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아가씨가 털어 놓는 사랑의 고백, 그것은 그 구도자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이며 함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의상의 구도심은 여기에 꺾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아가씨 선묘를 구도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 김상현 교수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歸命)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며, 대사(大事)를 성취하겠습니다.”
선묘의 이 서원에는 속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의상의 의연한 태도에는 구도자의 진정한 모습이 엿보인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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