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지혜에는 근기에 따른 차별이 없다
반야지혜에는 근기에 따른 차별이 없다
  • 법보신문
  • 승인 2011.09.2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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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지혜 크고 작음 없으나
미혹함이 있어 깨닫지 못해

 

바른 견해로 집착을 끊으면
금강경 한권 지닌 것과 같아

 

 

▲ 중국 신흥현 국은사 전탑. 혜능 스님이 열반하신 곳에 세워진 탑이다.

 

 

16. 근기(根機)

 

선지식들아, 만약 매우 깊은 법의 세계에 들고자 하고 반야삼매에 들고자하는 사람은 바르게 반야바라밀의 행을 닦을 것이며 오로지 ‘금강반야바라밀경’한 권만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반야삼매에 들어가느니라. 이 사람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경에서 분명히 찬탄하였으니, 능히 다 갖추어 설명하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최상승법으로서 큰 지혜와 높은 근기의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근기와 지혜가 작은 사람이 이 법을 들으면 마음에 믿음이 나지 않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유하면 마치 큰 용이 큰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염부제에 비가 내리면 풀잎이 떠다니듯 하고, 만약 큰비가 큰 바다에 내리면 불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의 사람은 ‘금강경’ 설하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깨치고 안다. (善知識 若欲入甚深法界 入般若三昧者 直修般若波羅蜜行 但持金剛般若波羅蜜經一卷 卽得見性 入般若三昧 當知此人 功德無量 經中分明讚嘆 不能具說 此是最上乘法 爲大智上根人說 小根智人 若聞法 心不生信 何以故 譬如大龍 若下大雨 雨於閻浮提 如漂草葉 若下大雨 雨於大海 不增不減 若大乘者 聞說金剛經 心開悟解)


금강경 한권만 지니고 읽으면 반야삼매에 들어간다는 말은 단순히 금강경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삼매에 들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반야는 분별을 떠난 맑고 밝은 지혜를 말합니다. 이런 지혜가 밥을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나 사람을 만날 때나, 경계와 관계없이 유지되는 것을 반야삼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단순히 금강경을 지니고 독송하는 것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금강경을 지니고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가르침을 마음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야삼매에 들 수 있습니다. 그래야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금강경은 단박에 깨달음을 여는 가장 높은 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경전입니다. 따라서 상근기의 사람은 금강경을 들으면 바로 마음이 열려 깨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근기의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마음에 번뇌와 삿된 망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차이를 근기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가르침에 대한 믿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상근기의 사람들은 금강경을 가르침을 한 치의 의심도 믿어 실천에 옮김으로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근기의 사람들은 이를 믿지 못하고 마음에 분별을 일으킵니다. 깨달음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위 글에서 염부제는 사바세계, 즉 중생들이 사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하근기의 사람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어도 염부제에 비가 온 듯 온갖 의심과 망상을 일으켜 오히려 혼란스러워하지만 상근기의 사람은 마치 바다에서 증발한 비가 다시 바다에 내리듯 어떤 혼란도 없이 본래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성품이 스스로 반야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서 문자를 빌리지 않음을 알라. 비유컨데, 그 빗물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 원래 용왕이 강과 바다 가운데서 이 물을 몸으로 이끌어 모든 중생과 모든 초목과 모든 유정. 무정을 다 윤택하게 하고, 그 모든 물의 여러 흐름이 다시 큰 바다에 들어가고 바다는 모든 물을 받아들여 한 몸으로 합쳐지는 것과 같나니, 중생의 본래 성품인 반야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故知本性自有般若之智 自用智惠觀照 不假文字 譬如其雨水 不從天有 元是龍王 於江海中 將身引此水 令一切衆生 一切草木 一切有情無情 悉皆蒙潤 諸水衆流 却入大海 海納衆水 合爲一體 衆生本性 般若之智 亦復如是)


우리의 본성은 그 자체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완벽합니다. 다만 삼독에 찌든 중생심이 밝은 본성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중생적인 요소를 걷어내 본래의 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배우고 익히기 위함이 아니라 본래 우리 마음속에 갖추고 있는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반야, 또는 깨달음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 내재돼 있습니다. 문자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중생적인 요소로, 탐욕과 어리석음이 검은 먹구름처럼 둘러싸고 있으니, 그것을 알아 없애면 우리의 자성은 밝은 태양처럼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문자의 가르침을 넘어 진리를 그대로 관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삼라만상은 우리의 본래 성품인 반야지혜에서 나옵니다. 108번뇌든 팔만사천 번뇌든 번뇌 또한 성품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번뇌와 깨달음이 다르지 않습니다. 한 몸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인 것입니다. 아름답고 더럽고 옳고 그름이 모두 성품 자리에서 나왔지만 우리의 본래 성품은 허공과 같아 차별이 없음으로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닷물이 증발해 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면 만물을 키우지만 결국 바다로 흘러들어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근기가 작은 사람은 단박에 깨치는 이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근성이 작은 대지의 초목이 큰 비를 맞고 모두 다 저절로 거꾸러져서 자라지 못함과 같나니, 작은 근기의 사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반야의 지혜가 있는 점은 큰 지혜를 가진 사람과 또한 차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고도 곧 깨치지 못하는가? 삿된 소견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마치 큰 구름이 해를 가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해가 능히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반야의 지혜도 또한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서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기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느니라.(小根之人 聞說此頓敎 猶如大地草木根性自小者 若被大雨一沃 悉皆自倒 不能增長 小根之人 亦復如是 有般若之智 與大智之人 亦無差別 因何聞法卽不悟 緣邪見障重 煩惱根深 猶如大雲蓋覆於日 不得風吹 日無能現 般若之智 亦無大小 爲一切衆生 自有迷心 外修覓佛 未悟自性)


우리의 본성은 반야지혜 그 자체입니다. 누구에게나 맑고 밝은 부처님이 평등하게 내재돼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있고 부처가 있듯이 차이가 존재합니다. 상근기와 하근기의 차이도 이렇습니다. 근기가 높은 사람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 단박에 몰록 깨닫게 됩니다. 가르침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기가 낮은 사람은 삿된 소견으로 상(相)에서 벗어나지 못해 분별과 번뇌를 일으킵니다. 쓸모없는 망상을 일으키고 진리를 의심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밝은 태양이 잠시 먹구름이 가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을 걷히면 환한 태양이 드러나듯이 근기가 높든 낮든 관계없이 모두에게 반야지혜는 평등하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근기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단박에 깨치는 가르침을 듣고 밖으로 닦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에서 자기의 본성으로 하여금 항상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 번뇌, 진로의 중생이 모두 다 당장에 깨치느니라. 마치 큰 바다가 모든 물의 흐름을 받아들여서 작은 물과 큰물이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과 같으니라. 곧 자성을 보면 안팎에 머물지 아니하며 오고감에 자유로워 집착하는 마음을 능히 없애어 통달하여 거리낌이 없나니, 마음으로 이 행을 닦으면 곧 ‘반야바라밀경’과 더불어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卽是小根人 聞其頓敎 不信外修 但於自心 令自本性常起正見 煩惱塵勞衆生 當時盡悟 猶如大海納於衆流 小水大水合爲一體 卽是見性 內外不住 來去自由 能除執心 通達無碍 心修此行 卽與般若波羅蜜經 本無差別)


우리는 밖에서 행복을 구하려고 합니다. 재물을 쌓고 좋은 옷, 좋은 자동차 끊임없이 외부에서 끌어옵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가져온 것들로 인해 우리는 커다란 고통을 받습니다.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해야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행복을 위해 취한 것들이 오히려 주인이 되고 스스로는 그 물건들의 노예가 됩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버려야 합니다. 놓아야 합니다. 버리고 놓으면 행복해집니다.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얽매이기 않기 때문입니다. 구속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또 계속해서 비우고 덜다보면 결국에는 내재돼 있는 진여자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부처님이 현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놓아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행복은 절로 내 안에 깃들게 됩니다. 깨달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외부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내 안에 모두 내재돼 있습니다. 그러니 드러나게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근기의 사람들은 밖에서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갈구합니다. 그런 이유로 반야지혜가 본래 우리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달음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마음이 본래 반야지혜임을 알게 되면 바로 깨닫게 됩니다.

 

종광 스님

반야지혜는 근기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재돼 있기 때문입니다.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면 내재돼 있는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반야바리밀인 것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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