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 먹음과 버림, 그리고 불교적 대안

기자명 법보신문

적게 먹고 만족할 줄 알아야 비만 극복

 

2007년 4월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에코붓다가 친환경 식사법인 빈그릇운동의 범사회적 확산을 위해 600인분의 대형비빔밥을 만드는 이벤트를 개최했다.

 

 

불과 한 세대 전만해도 걷는 것은 이동수단이었을 뿐 운동이 아니었다. 또 선글라스와 같이 상대에게 자신의 시선을 가리는 것은 타인에 대한 결례였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공원과 강변에서 운동으로 걷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일상이 됐다. 이제 걷는 사람들은 썬 캡을 깊이 눌러 쓰거나,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을 연상시키는 얼굴 전면 차단 마스크 등 ‘중무기를 착용하고 걷기’라는 성전(聖戰)에 임한다. 언뜻 생김새만 놓고 보면,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들이 우리의 공원과 강변에서 대회합을 가지고 집단훈련을 하는 것 같다. 지구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도 저들이 있으니, 우리나라만은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비만과 건강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화두다. 건강 문제는 수명이 갑자기 길어지면서 절실해진 것이다. 1세기 전만해도 환갑은 큰 동네잔치였다. 그 만큼 환갑을 넘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다. 고희의 어원이기도 한 두보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즉 70을 사는 것은 희유한 일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는 이제 그런 희유한 나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또 현대는 죽고 싶어도 쉽게 죽을 수 없는, 어떻게 보면 매우 잔인한 세상이다. 더구나 가족은 해체되어 자신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져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시대보다도 건강이 강력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현대인 화두, 비만과 건강
밥처럼 간식 먹는 습관 탓 


먹을 게 없었던 시절 건강 이상은 영향결핍이나 과도한 노동의 결과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이제는 역으로 영양과다로 인한 비만과 운동부족이 건강을 가로막는 첨병이다. 우리나라는 뒤늦게 도시화에 뛰어들었지만, 가장 단시간 내 도시화를 완성했다. 그 결과 문화 관념의 변화속도보다 환경의 변화가 훨씬 더 빠른 상황에 직면했다.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인사는 지금도 유효하다. 간식과 주식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어서 간식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주식을 먹어야지 왠지 손해 보지 않는 느낌이 든다. 또 어디를 가든 친밀감을 나타내는 수단은 먹을 것을 권하는 것이며, 안 먹겠다고 거절하는 것은 상대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모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을 반영하는 문화이지만, 환경이 변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들 비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어른들은 피자를 시키면 입에 안 맞아 두 조각 이상은 못 먹겠다고 한다. 느끼해서 빨리 밥을 먹어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조각 피자는 이미 밥보다 훨씬 많은 칼로리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 피자는 주식이다. 그런데 피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에서도 혼자서 피자 한 판을 다 먹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는 타문화권의 주식을 간식으로 먹고 입에 안 맞는다고 또다시 밥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피자만이 아니라 빵도 비슷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살이 안 찐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일 것이다.


관점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독수리 5형제가 돼서 공원을 돌아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붓다는 이런 것을 ‘불을 끄지 않고 불 위의 솥에 부채질을 해 식히려는 격’이라고 했다. 음식을 권하는 문화를 바꾸고, 간식은 배불러도 먹을 수 있으며 주식과 호환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없애야한다. 해법은 본질에서 찾아야지 말단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로 낭비되는 비용이 연간 수십조에 이른다. 처리비용 역시 만만치 않다. 가장 좋은 것은 효율적인 식문화 정착이지만,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음식을 권하는 문화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관념이 지배적인 우리나라에서 이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정서에는 음식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는 음식이 부족했던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특히 쌀에 대해서는 숭배양상 마저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음식은 차치하고라도 밥을 남기는 것은 문제 삼는 경우가 있다.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음식은 넉넉해야지 부족해선 안 된다는 생각. 이러한 두 가지 문화 관념이 전 국민을 비만으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새롭게 대두되는 가치가 바로 발우공양이다. 필요한 음식만을 덜어서 남김없이 먹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붓다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이러한 식문화를 제창한 적이 없다. 붓다가 제시한 것은 ‘적게 먹고, 남거든 버리라는 것’이다. 붓다 당시 승원에서 음식을 버렸다는 말을 하면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상당히 많았다. 왜냐하면, 주는 사람이 양을 결정하는 탁발에 의존하다 보니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때론 남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과식으로 의료 비용 증가 
필요한 만큼 음식 먹어야


붓다는 필요 없는 것을 억지로 먹는 것 보다는 버리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유효하다. 남은 음식을 억지로 먹고 힘들어하는 것은 금붕어나 병아리에게서나 살펴볼 수 있는 미련함이다.
필요 없다면 과감히 버리는 것이 맞다. 굳이 먹고서 칼로리 소모를 위해 독수리 5형제로 변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음식물처리 비용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용이 의료비 등으로 지출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버리는 것이 더 경제적이며 국민건강에도 유용하다는 말이다. 또 버리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반복되면 조리과정 중에서 음식량을 줄이는 기대효과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음식낭비가 크기 때문에 사찰 발우공양을 말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이는 동북아에서 음식이 부족해 생긴 특수한 문화다. 그러나 발우공양은 지금의 시대에는 맞는 것이 아니다. 밥을 다 먹고 식기를 세척한 물로 디저트를 삼는 것은 구시대적일 뿐이다.


문화는 발전할수록 분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화가 발우공양에는 없다. 이 말은 발우공양이 오늘날의 음식낭비에 있어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현 스님

붓다의 주장은 ‘적게 먹고, 만족을 알라는 것’이다. 이는 음식은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해준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환기다. 억지로 남은 것을 먹거나 식기를 씻어서 먹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의 눈으로 볼 때 버려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수단은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의 의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