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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초의의 ‘동다송’

기자명 법보신문

고금의 서적 두루 섭렵해 우리차 이론 정립

동다송은 한국 대표 茶書
실증적 체험 담아서 저술

경화사족의 차 애호 촉발
다양한 다서 출현 계기돼


초의 스님의 ‘동다송’은 한국의 대표적인 다서(茶書)로 손꼽힌다. 이는 우리나라의 차가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차의 역사, 문화 전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동다송’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물론 한국의 차에 대한 정보는 ‘동다송’ 이외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조선왕조실록’ 등과 같은 역사서와 문인이나 승려들이 남긴 시문을 통해 시대마다 사람들이 차를 이해했던 편린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차의 전모를 살펴보기에는 자료의 제한성과 한계점을 극복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료의 부족은 한국 차문화를 다층적으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된 것도 현실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초의의 ‘동다송’은 선종 차를 이은 승려가 차를 연구하고, 제다법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증적인 체험을 토대로 다서를 저술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더구나 조선후기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애호는 초의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중국 다서를 등초한 다양한 다서가 출현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초의는 언제부터 차를 알았을까. 그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자. 초의가 차를 처음 접한 것은 운흥사로, 대흥사로 거처를 옮긴 이후 차에 대한 개안이 확대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아암과 그의 제자 철선의 소개로 다산초당으로 다산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시학과 역사관을 익히면서 학문적인 안목이 크게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교유가 경화학계로 확대된 것이다.

 

 

▲김홍도의 초원시명도(焦園試茗圖). 파초 밑에서 더벅머리 동자가 차를 끓이고 있는 모습은 조선후기 차 풍속도를 잘 보여준다. 간송미술관 소장.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다산의 장자인 유산 정학연은 초의에게 추사 김정희를 소개 해준 인물이다. 북학파 경화사족들이 차를 애호하게 된 실질적인 계기도 이로 부터 싹튼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한편 아암의 차에 대한 안목은 대흥사에 전승된 차의 심원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조선후기 사원의 경제력으로는 수준 높은 차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서산 스님 이후 대흥사의 음다 전통은 겨우 원형적인 명맥을 잇는 정도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따라서 초의가 이룩한 차의 질적인 복원, 다시 말해 다서의 저술과 초의차의 완성은 고려시대 융성했던 시기의 차 문화로 복원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 평가된다.


그가 다서를 섭렵하고 차의 이론을 정립한 정황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만보전서(萬寶全書)’를 등초(騰抄)해 두해 만에 정서(正書)한 ‘다신전(茶神傳)’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명대 장원의 ‘다록(茶錄)’을 등초한 것이지만 이 다서를 정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차에 대한 견해를 자신 있게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다신전’을 편찬하기 전부터 중국의 다서를 두루 익혔던 것은 아니었을까.


초의의 유품목록집인 ‘일지암서책목록(一支庵書冊目錄)’에는 ‘다경’이 그의 애장도서로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1861년 시헌서(時憲書)의 이면지를 활용해 초의의 유품 목록을 기록한 이 자료는 초의가 열반한 후, 그의 제자 서암(恕庵, ?~1876)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은 소치 허련의 ‘소치실록’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초의)선사가 마침내 새 절을 지어, 일로향실로 (거처를)옮겨 지내다가 열반하였다. 그의 고제(高第) 서암이 (초의의)의발을 받았는데 지금은 진불암에서 머문다. 작년 7월 나와 이희풍(李喜豊)이 함께 종상재 상청에 가서 조문하였다(草師竟建新殿 移處一爐香室 老而示寂 其上足恕庵善機受衣鉢 今在眞佛庵 昨年七月 余與李松坡往哭其終祥齋所焉)


소치가 말하는 새 절이란 바로 1845년 신관호의 후원으로 후불탱화를 조성한 후, 1851년에 완공한 대광명전을 말한다. ‘대광명전신건기(大光明殿新建記)’는 1851년 6월에 윤치영이 지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새 절의 완공 사실은 확인된다. 그는 새 절을 완공한 후 일지암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수행했다는 사실은 소치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로향실은 초의의 실명(室名)이다. 이 편액은 바로 추사가 제주도에서 써 초의에게 보낸 것으로, 그들의 교유 관계에서 시기적으로나 교유의 정도를 차와 연관시켜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추사의 걸명(乞茗)이 촉박했던 제주도 유배시절, 추사의 유일한 안식처는 차였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한편 소치는 초의의 대상 때에 상청(喪廳)을 찾아 조문한다. 이는 초의가 열반 후 2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종상은 대상(大祥)을 말하는 것이니 대략 초의의 열반 후, 2년 뒤에 지내는 제사에 참석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대흥사를 찾은 것은 7월이다. 바로 7월2일은 초의의 열반일이라는 점에서 그는 초의의 대상일인 1868년 7월2일을 전후해 대흥사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초의의 상청에 조문했던 인물은 이희풍(李喜豊)이다. 송파는 그의 호이다. 그는 초의에게 시학을 배웠던 인물로, 오랫동안 초의와 교유하였다.

 

동다송 다도사상은 일미선
본인 차에 대한 긍지 담겨

군자의 음료 은근히 부각
실질적 제다방법도 제시


그가 지은 ‘초의대사탑명(草衣大師塔銘)’에 “초의선사가 이미 열반한 지 6년이 되던 해에 (초의의 제자)선기 등이 그 유치(遺齒)를 모실 탑을 세우고 나에게 탑명을 부탁했다. 내가 총각 때부터 대사를 따라 시를 배웠으니 정의가 두터웠다(師旣歿於六年 善機等奉其遺齒 將治堵而藏之 請文於余 余自總角時 從師學詩 契誼素厚)”라 한 것에서도 그와 초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소치가 초의의 열반 소식을 들었지만 바로 조문하지 못하였고, 대상 때에 비로소 조문했다는 사실과 서암이 초의의 유물을 수습하여 유물 목록을 작성했던 당시의 정황이 사실로 확인 된 셈이다.


초의는 ‘다신전(茶神傳)’을 편찬하기 이전 이미 육우의 ‘다경(茶經)’이외에도 ‘다보(茶譜)’와 ‘군방보(群芳譜)’를 통해서도 차에 대한 이해를 넓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명대의 고렴(高濂, 1573~1620)이 편찬한 ‘준생팔전(遵生八錢)’은 총 20권으로, 양생(養生)에 대한 전문서적인데 이 책이 문인들의 취미 생활에 관한 내용을 두루 담고 있어,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의 애독서였다. 양생에 관심이 많았던 초의는 이 책을 두루 섭렵하여 차에 대한 이해를 확대했으리라 여겨진다.

 

 

                         ▲ 일지암서책목록                                            초의 스님 친필서첩

 


‘동다송’에 드러난 그의 다도사상은 일미선(一味禪)의 입장에서 그의 다도사상을 전개했다. 그리고 ‘초의선과(草衣禪科)’에서 “송은 그 의를 드러내 칭송하여 그 오묘한 요점을 선별하여 원류를 소통하는 것(頌者 頌選其要妙 疏通源流)”이라 한 것으로 보아 초의는 ‘동다송’을 통해 차의 원류를 세상에 소통코자 했다. “하늘과 신선, 사람과 귀신이 모두 아끼고 중히 여겨(天仙人鬼俱愛重)” “염제께서 일찍이 맛보고 식경에 실었다(炎帝曾嘗載食經)”고 한 그의 차에 대한 견해나 “술을 깨게 하고 잠을 적게 하는 차의 효능은 주공이 증명했다(解少眠證周聖)”고 한 말을 주목하고자 한다.


차의 우수한 효능을 증명한 성인, 즉 주공은 주나라의 예악형도(禮樂刑度)를 갖추게 한 인물이다. 공자는 늘 그를 흠모하였다. 차의 효능을 주공이 증명했다는 것은 바로 유학자인 홍현주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차의 우수한 효능을 주공을 통해 증명해 보인 것. 특히 차를 즐긴 인물로 제나라 안영(晏)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차는 검소하고, 덕이 있는 군자가 즐기는 고상한 음료이라는 점을 은근히 부각하고자 한 것. 초의의 의중(意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음식 중에 으뜸이었던 차는 한번이라도 오염되면 그 진성을 잃는다는 차의 품성을 이해한 것은 차를 즐긴 문인들이었다. 그가 초의차를 복원한 후 우리 차에 대한 자부심을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효가 있다지만 우리 차는 두 가지를 모두 겸비했다”고 천명했다. 이는 그가 만든 초의차에 대한 자긍심이었고,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조선후기, 차는 저급한 수준이었다. 이미 올바른 제다법과 탕법이 사라져 버린 것.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은 ‘동다송’에서 지리산 칠불암의 수행승들이 차를 함부로 다루고 있음을 질타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천명한 다도는 중정의 오묘함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차의 참다운 정기를 체(體: 물)와 신(神: 차)으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체와 신이 온전해도 중정을 잃을까 두렵다. 중정을 잃지 않아야 차의 정기가 드러난다(體神雖全 猶恐過中正 中正不過健靈倂)”는 것은 탕법의 적합성, 다시 말해 물을 잘 끓여, 차와 물의 양을 고르게 하고, 침출시간을 적의(適宜)하게 해야만 차의 정기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중정은 다도의 핵심이다. 이는 차와 물, 차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적의를 강조한 것인데 이는 차를 다루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을 뿐 다도사상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박동춘 소장

오히려 그의 다도 사상은 피차를 분별하지 말라는 일미(一味)로 드러나, 자연합일(自然合一)이나 원융(圓融)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그의 다도사상은 ‘동다송’ 말미에 “백운과 명월 두 객을 허락하니 도인의 자리 이것이 최상승이로다(許白雲明月爲二客 道人座上此爲勝)”라고 한 대목에서도 확연히 드러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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