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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라다크왕조의 여름궁전 셰이팔레스

기자명 법보신문

검은 그을음 덮힌 벽화 옛 왕조의 슬픈 자화상

 

▲셰이팔레스 오르는 길엔 진언이 새겨진 바위 마니석이 즐비하다. 셰이팔레스 주변에는 수백개의 초르덴이 흩어져 있다.

 

 

“눈이여, 내 눈이여, 조금만 있거라. 인도에 적응하기엔 너무 이르다.”


1970년대 인도를 순례한 석지현 스님은 현란하고 혼란한, 너무도 이질적인 인도의 풍경 앞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라다크의 하늘 아래서 문득 이 문장이 떠오른 것은 사실, 경계심 때문이다.


유독 하늘이 푸른 날이다. 사진기의 노출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바늘 끝 같은 조리개를 뚫고 들어오는 빛을 감당할 수 없을 만치 빛나는 날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찬란함에 경탄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약아빠진 눈동자는 벌써 꾀를 낸다. 이 하늘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한껏 여유를 부리려한다. 벌써 라다크의 하늘에 적응해 버린 것인가. 아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나른함과 피로를 앞세워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태에 빠지는 순간 순례는 한가로운 나들이 길이 돼버릴 것이다.


왕족 떠난 후 버려진 궁전


아니나 다를까. 우려는 얼마가지 못해 현실이 돼버린다. 레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셰이팔레스로 가는 길, 꼭 둘러봐야할 곳을 놓치고야 말았다. 물론 그 사실조차 나중에야 알고 말았지만.


셰이팔레스는 원래 라다크왕조의 여름궁전이었다. 후에 사원이 세워져 지금은 셰이곰파로도 불리지만 공식 명칭은 여전히 셰이팔레스다. 하지만 ‘팔레스’라는 호칭은 무색하다. 라다크왕조의 전성기인 1645년 건설된 이 궁전은 19세기 카슈미르와의 전쟁으로 심하게 파괴되었고 1834년 왕실가족이 왕궁을 버리고 떠난 후 줄곧 버려져 있었다. 그러니 왕조의 위용보다는 폐망한 왕국의 쓸쓸함과 전쟁의 처참함만이 객이 되어 남아있다.

 

 

▲셰이팔레스 안에 조성돼 있는 곰파엔 라다크왕조의 전성기인 17세기에 조성된 높이 12m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참배객을 맞아 준다.

 


이렇게 푸른 날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곳, 그래서인지 셰이팔레스를 찾아가는 길에는 도통 흥이 나질 않는다. 덕분에 가는 길목에 조성돼 있다는 거대한 마애불을 그냥 지나쳐버리고야 말았다. 이 마애불이야말로 셰이팔레스의 여러 유적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인데 말이다. 제작 연대는 8세기 직후로 추정되고 있는데 중앙의 비로자나부처님을 포함 총 다섯 분의 부처님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그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런 저런 사연도 모른 채, 바위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옛 궁전으로 가기 위해 비탈길을 걸어 오른다. 궁전을 등에 지고 있는 커다란 바위 언덕 곳곳에는 진언과 경구 등을 새겨 놓은 마니석들이 즐비하다. 도열해있는 초르덴과 마니석이 어울린 풍경이 힘든 걸음을 위로한다.


셰이팔레스는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하지만 복원 작업을 하는 인부는 별로 눈에 띠지 않고 군인 차림의 젊은이들이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 왕이 살지 않는 궁을 복원하는 일에 신명이 날 리 없다. 복원 속도는 한 없이 느려 보인다. 그래도 이제 막 복원된 듯한 건물은 제법 화려해 보이는 붉은 창틀로 장식돼 있고 벽돌은 반듯하지만 그것은 박제한 동물의 털에 기름을 바른 꼴이다. 처참한 포격의 흔적이 선명한 옛 건물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겉돌 뿐이다.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본 건물 뒤편 더 높은 곳에는 옛 건물의 잔해가 바위산과 구분조차 되지 않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라다크 왕조 초기에 건설된 요새였는데 건물 모퉁이 몇 개와 간신히 서 있는 담장 몇 조각이 그곳에 구조물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보다는 산산이 부서져 쌓여있는 벽돌과 갈라진 바위산들이 그곳에서 격렬한 전투와 무차별한 포격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더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셰이팔레스를 찾는 관광객들과 순례객들이 적지 않다. 라다크 지역에서 가장 크다는 구리불상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구리 불상은 높이가 12m에 이르는데, 1970년 흙을 빚어 조성한 14m 크기의 미륵부처님이 틱세 곰파(Tikse Gompa)에 조성되기 전까지는 재질을 불문하고 라다크 지역에서 가장 큰 부처님이었다. 이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셰이팔레스가 아닌 셰이곰파를 찾아온 것이다. 라다크왕국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던 셍게 남걀왕의 아들인 델단 남걀왕이 조성했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구리로 조성한 불상 위에 도금을 하는 데에만 무려 5kg의 금이 들어갔다. 네팔에서 온 조각가와 세 명의 라다크 장인들이 불상을 조성했으며 복장에는 각종 곡식과 보석, 경전, 만트라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대감이 높아진다.


커다란 창문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법당으로 들어서니 매캐한 기름 냄새가 먼저 코를 찌른다. 그리 넓지 않은 법당 안쪽에서 간장 종지만한 기름등 십여 개가 불을 밝히고 있는 탓이다. 부처님 앞에 공양하려는 불자들의 정성이니 불을 밝히고 있는 등불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다만 그을음이 법당 벽에 덕지덕지 눌어붙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 벽에는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벽화보다도 아름다운 그림들이 있다.


살아있는 듯 생생한 벽화속 인물들


▲법당 내부 벽화 속 인물의 생생한 표정.
하얀 천의를 두른 보살상의 자태는 고혹적이고 금강저를 쥐고 있는 부처님의 법신은 유연하면서도 당당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불보살 주변에 빼곡히 그려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곡식과 과일 등을 담아 공양하는 이의 태도는 정성스럽고 뒷걸음질 치며 버티는 강아지를 부처님께 끌고 가려는 사람의 몸짓은 우스꽝스럽다. 불법을 구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듯 한 구법승도 보이고, 등에 온갖 그릇을 잔뜩 짊어진 상인은 전형적인 중국 한족의 모습이다. 머리에 하얀 터번을 두른 아랍인도 등장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방금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생기발랄하다. 부처님을 친견하고 공양을 올릴 수 있어 더없이 기쁜 듯 보이기도 한다.


아잔타 불교석굴이나 돈황 막고굴의 벽화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지만, 혹은 앞서 지나온 알치곰파의 벽화가 라다크 최고의 예술이라지만 이 벽화들이 그에 못지않아 보인다면 짧은 안목의 속단일까. 비록 그을음에 뒤덮여 퇴색되고 떨어져나가 거친 흙벽의 속살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 위에 남아있는 불보살의 미소는 여전히 선명하고 법신의 윤곽은 뚜렷하다.


전문가들의 높은 안목으로 보면 아잔타 석굴이나 막고굴의 벽화보다 그 수준이 턱없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불쑥 마주친 벽화는 한없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더구나 저 검은 그을음에 머지않아 제 색을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법당을 지키고 있는 노스님의 한가한 미소조차 원망스럽다. 그 안타까움과 서글픔이 이 위태로운 벽화들을 향한 막연한 연민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당 내부 가득한 벽화를 모두 둘러보느라 정신이 팔려 정작 이 법당의 주인, 석가모니부처님께는 미처 눈길이 머물지 못했다. 틱세곰파의 미륵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3층의 건물을 관통해 좌정하고 있다. 이곳 법당에서는 부처님의 가슴과 두상만 보일뿐이다. 법당 정면의 창문은 부처님의 상호를 비추기 위함이었다.


틱세곰파의 미륵부처님이 여성적이라면 이곳의 부처님은 남성적이다. 자신감에 가득 차있는 표정과 떡 벌어진 넓은 어깨의 금빛 법신은 당당하고 젊은 석가모니이자 왕조의 전성기를 이어 받은 델단 남걀왕의 자신감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 하다.


전성기 왕국의 자신감 투영된 불상


가장 큰 것은 불상만이 아니다. 법당 입구 옆에 세워져 있는 라다크왕조의 초르덴은 빅토리스투파로 불리는데 이 탑 역시 라다크 지역에서 가장 크다. 탑의 정상 부분은 순금 보개(寶蓋)로 장식돼 있다. 법당 아래층에는 고서들이 쌓여있는 커다란 도서관도 있지만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아 들어가지 못한다.


법당을 나서니 빅토리 스투파의 황금 보개 위에서 부서진 햇살들이 몸서리치듯 흩어진다.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다지만 황폐해진 왕궁 안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옛 왕조의 찬란했던 추억은 보는 이들을 더욱 아련하고 서글프게 만든다.

 

 

▲셰이팔레스 중심부에는 라다크 지역에서 가장 크다는 ‘빅토리 스투파’가 우뚝 서 있다.        

 


실크로드의 요충지이자 고급 모직물인 파쉬미나의 교역권을 장악하며 히말라야의 맹주로 우뚝 섰던 라다크왕조는 그 교역권을 탐낸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고, 결국 잠무지역의 토후국인 도그라의 침략으로 1834년 종말을 맞는다. 왕족들은 궁에서 쫓겨나 더 멀리 떨어져있는 스톡팔레스로 떠나야했다.


물론 라다크왕조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막대한 왕실 소유의 재산과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각종 유적의 입장료 등을 징수하며 경제적 부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왕조의 찬란한 명성은 퇴색하고 그저 ‘로얄패밀리’의 이름만 근근이 이어오고 있다. 마치 라다크의 햇살이 만들어낸 짙은 그림자처럼 하늘의 땅에 낮게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히말라야산맥을 호령하며 아름다운 문화의 꽃을 피웠던 라다크왕조의 황금기. 그 아련한 과거의 추억은 저 법당 안 부처님의 굳세고 빛나는 미소 속에 다시 묻어둔 채 라다크왕조의 마지막 궁전 스톡팔레스로 발길을 돌린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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