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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

기자명 법보신문

국경과 나이 초월한 당대 최고 지성인의 교유


지엄 문하에서 동문수학
의상은 실천수행이 강점

 

법장은 화엄교학 집대성
18세 차이에도 절차탁마

 

 

▲1300년 전 중국 화엄종 제3조 법장 스님이 해동화엄초조 의상 스님에게 보낸 편지는 신라와 중국을 거쳐 지금은 일본 천리대학에 보관돼 있다.

 


천삼백 년을 전해오는 편지 한 통이 있다. 험한 바다 건너 당나라에서 신라로 전해졌던, 지금까지도 원본이 전하는 이 편지는 법장이 의상에게 보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우정 어린 내용은 더욱 향기롭다.


당나라 수도 장안 가까이에 종남산(終南山)이 있고, 이 산의 지상사(至相寺)에는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이 여러 제자들에게 화엄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문하에는 혜효(慧曉), 박진(薄塵) 등 제자가 많았지만, 참으로 걸출한 제자는 의상(義相)과 법장(法藏, 643~712)이었다. 법장은 지엄이 운화사(雲華寺)에서 ‘화엄경’을 강의할 때 이를 듣고서 입문했는데, 대개 의상이 입실(入室)하던 그 무렵이었다.


당시 20세의 법장은 의상보다 18세 연하였고, 또한 정식으로 출가하지 않은 세속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16세 때 불탑 앞에서 손가락 하나를 태워 공양했고, 그 후 몇 년 동안 태백산의 암자에서 고행하며 불전을 공부했던 열렬한 구도자였다. 같은 스승 문하에서 함께 ‘화엄경’을 공부했던 의상과 법장의 교유는 진정 우정 깊은 것이었다. 그들의 우정에는 출가자와 세속인이라는 형식도 나이도 문제 되지 않았다.


스승은 제자들의 사람됨이나 장단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각자의 장점과 특징을 잘 살리고 펼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은 스승의 당연한 도리다. 지엄은 의상과 현수 두 제자에게 각각 의지(義持)와 문지(文持)라는 호를 주었다. 의상은 수행자적인 실천수행에 장점이 있고, 법장은 학자적인 이론 탐구에 뛰어났음을 스승은 간파했던 것이다.


지엄은 돌아가기 전에 도성(道成)과 박진(薄塵) 두 제자에게 당부했다. 대(代)를 잇고 법을 유전(遺傳)할 사람은 오직 법장이라고. 이처럼 지엄이 의상을 제쳐두고 아직 출가도 하지 않은 젊은 법장에게 중국 화엄종의 제3조를 부촉한 것은 법장이 의상보다 뛰어나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의상은 고국 신라로 귀국할 것을 지엄은 짐작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의상은 670년에 신라로 귀국했고, 이 해에 법장은 측천무후(測天武后)가 세운 태원사(太元寺)의 주지로 임명되면서 정식으로 수계했다. 법장이 측천무후를 위하여 화엄의 십현연기(十玄緣起)를 강의하고 지은 ‘금사자장(金師子章)’은 유명하다. 중국 화엄종의 제3조 법장은 일생 동안 ‘화엄경’을 30여 회나 강설했고, 화엄교학 연구에 주력, 많은 저술로 화엄학(華嚴學)을 집대성 했다.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자(字)를 따라 현수(賢首)라고 불렀고, 황제는 국일법사(國一法師)라는 명예로운 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의상이 귀국한 뒤에도 두 도반(道伴)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바다를 사이로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마음으로는 매우 가깝게 교유했던 것이다. 신라 승려 효충(孝忠)이 당나라로 갈 때 의상은 금 9푼을 그 편에 보내어 법장에게 전하도록 했던 일이 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례다. 법장 문하로 가서 화엄을 공부한 신라 승려도 있다. 곧 승전(勝詮)의 경우다. 아마도 승전의 유학은 의상이 추천했을 것이다. 의상이 분황사의 승려 순범(純梵)을 법장에게 보내어 ‘극과회심지의(極果廻心之義)’에 대한 법장의 생각을 물어보도록 했던 경우도 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교유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무렵 신라와 당나라는 전쟁 중에 있었다. 전쟁의 와중에도 구도의 길은 열려 있었고, 진리의 벗은 서로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다.
치열했던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쟁도 끝난, 문무왕 16년(676)에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은 화엄사상을 두루 펴기 시작했다.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부석사로 찾아들었고, 국왕도 의상을 존경했다. 어느 날 의상은 법장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법장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하는 신라 승려 승전(勝詮)의 편에 법장이 자신의 저술과 함께 부처 보낸 편지였다. 종남산을 떠나온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690~692년 무렵이었다. 692년이었다면, 의상은 68세, 법장은 50세였다.


당 서경 숭복사승(唐西京崇福寺僧) 법장은 해동 신라 대화엄법사(大華嚴法師) 시자(侍者)에게 글월을 드립니다.
한 번 작별한 지 20여년,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연운(烟雲) 만리(萬里)에 바다와 육지가 첩첩히 쌓였으니 일생에 다시 만나 뵙지 못할 것을 한하니, 회포 연연하여 어찌 말로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에 인연을 같이했고 금생에 업(業)을 같이했으므로, 이 과보를 얻어 대경(大經)에 함께 목욕하고, 특히 선사(先師)로부터 이 심오한 경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개연천명(開演闡明)해, 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를 선양하여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고 또 새롭게 하여 크고도 넓게 이익을 끼치신다고 하니 기쁨이 더욱 더 하고, 이로써 부처님 멸후(滅後)에 불법을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을 오래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法師)임을 알았습니다.
법장(法藏)은 진취(進趣)함에 이룸이 없고, 주선(周旋) 또한 적어,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선사(先師)에게 부끄럽습니다. 분(分)에 따라 수지(守持)하고 버리지 않아 이 업(業)에 의해 미래의 인연 맺기를 원합니다. 다만 화상(和尙)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략하여 후인이 그 법문(法門)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스님의 미묘한 말씀과 미언묘지(微言妙旨)를 자세히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근일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고향에 돌아가 그것을 그 땅에 전할 것이오니, 청하옵건대, 상인은 그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당래(當來)에는 이 몸을 버리고 다시 몸을 받아 함께 노사나불(盧遮那佛)의 회상(會上)에서 이와 같은 한량없는 묘법(妙法)을 청수(聽受)하고,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보현행원(普賢願行)을 수행하여 남은 악업(惡業)이 하루아침에 떨쳐버릴 것을 바랍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인은 과거의 교분을 잊지 마시고,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시고,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존몰(存沒)을 물어주소서.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법장(法藏) 화남(和南) 정월 28일


이상은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앞뒤가 잘 갖추어진 편지다. 편지를 쓴 해를 생략한 채 월일만을 기록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한 스승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는 인연은 크다.
그리고 법장이 따로 봉해서 보냈던 서신이 있었는데, 곧 다음이 그것이다.

 

나당전쟁 때 의상 귀국
국경 넘어 교유는 지속

 

법장, 인편에 편지 전달
행간마다 애틋함 담겨


‘탐현기(探玄記)’ 20권, 그 중 두 권을 미완성이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형의장(玄義章)’ 등 잡의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疏)’ 2권, ‘십이문소(十二門疏)’ 1권, ‘법계무차별논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초사(抄寫)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지난번 신라 스님 효충(孝忠)이 금 9푼을 전해주면서 상인(上人)이 부친 것이라고 하니, 비록 서신은 받지 못했지만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서국(西國)의 군지조관(軍持灌) 하나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살펴 받아주시기 원하며, 삼가 아뢰옵니다.


이 별폭(別幅)의 서신에 의해, 신라의 승려 효충이 입당할 때 의상은 법장에게 금 9푼을 전한 바 있고, 또 법장은 의상에게 인도의 조관(灌)을 선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두 도반은 당과 신라로 헤어져 멀리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매우 가깝게 교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바다를 건너서 만난 도반은 더욱 깊은 인연. ‘화엄경’이라는 대경(大經)에 함께 목욕한 인연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운 것. 그들 화엄행자(華嚴行者)가 생각하던 수행은 보현행원(普賢願行), 그리고 천명하고자 했던 사상은 법계무애연기(法界無碍緣起)의 화엄사상. 제망(帝網)은 제석천궁(帝釋天宮)의 보배 거물인 인드라망.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거물처럼 모두가 얽혀있다. 무한히 거대한 세계로부터 무한히 작은 세계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기한다. 그것이 제망이고 법계무애연기다. 붓다는 말씀하셨다.


“연기(緣起)를 보는 자 그는 법(法)을 본다. 법을 보는 자 그는 연기를 본다.”
의상과 법장은 행복했다. 그들은 법계무애연기를 보고 있었으니. 법장의 많은 저서는 알뜰한 제자 승전이 필사하여 신라에 전했다. 법장의 글을 본 의상은 스승 지엄화상의 교훈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이에 열흘 동안이나 문을 닫고 탐구했다. 문을 열고 나온 의상은 뛰어난 제자 진정(眞定) 상원(相元), 양원(良圓) 표훈(表訓)으로 하여금 ‘탐현기’를 각기 나누어 강의하라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의 식견을 넓혀 주는 이는 장공(藏公)이다.”
법장 친필의 이 편지가 원래 신라로 전해졌을 것은 당연하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이 편지의 한 구절이 인용된 것도,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에 전문이 수록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는 1147년 이전 어느 때에 송나라에 복귀(復歸)하여 전해지고 있었다. 의천이 송나라로 갔던 1085년에 가져다 전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 이 편지 원본 뒤에는 이 진보(珍寶)를 수장했던 원말명초(元末明初) 12명의 제발(題跋)과 청말(淸末)의 여러 제발이 붙어 있다. 이 편지가 베이징의 유리창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16년. 오영광(吳榮光)이 이를 발견했고, 후에 건륭제(乾隆帝)의 황자(皇子) 성친왕(成親王)에게 귀속되었다가 다시 몇 사람 호사가의 소장을 거쳐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김상현 교수
그리고 다시 1955년경 바다를 건너 일본에 이르렀고, 지금은 일본의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으니, 다시 천년 뒤에도 전해질 것이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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