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초의와 다산가(茶山家)
27. 초의와 다산가(茶山家)
  • 법보신문
  • 승인 2011.10.2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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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차의 맑은 향이 폐 속까지 스밉니다”

다산 강진유배 계기로
그의 아들들과도 교유

다산가와 깊은 우정이
차문화 중흥의 시발점


다산 손자도 차 애호가
초의, 직접 만들어 선물

정대무의 감사 편지에는
초의차 품격 잘 드러나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정학유는 초의 스님과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초의 스님이 보내 준 차를 벗들과 함께 마시며 다삼매에 젖기도 했다. 그림은 이광사의 ‘고사주유도’.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초의 스님에게 미친 영향력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로부터 훈습 받은 시학과 학문은 훗날 초의가 사대부들과의 교유를 풍요롭게 만든 원천(源泉)이었다. 뿐만 아니라 초의의 막후 후견인이었던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1783~1859)의 변치 않는 우정은 초의가 차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터전을 만들어 준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의 지중한 인연의 끈은 후대까지 이어졌는데, 이는 다산의 손자 정대림(丁大林)과 정대무(丁大懋)가 초의뿐만 아니라 제자 범해와도 내왕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대둔사 승려들과 다산가(茶山家)의 깊은 인연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유불간의 교유관계 이외에도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의 배경을 밝히는데 있어서 꼭 짚어 봐야할 문제이다.


다산가와 대둔사 승려들의 교유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된 것은 1801년이다. 유산이 아버지의 적거지를 찾은 해는 1802년이고, 1805년 다시 강진으로 내려왔다. 다산부자(茶山父子)가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머문 것은 이 무렵이다. 당시 다산은 사의제에서 궁색하게 지낼 때인지라 부자가 함께 거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산부자가 보은산방에서 삼동(三冬)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황을 알았던 아암 혜장(兒菴 惠藏, 1772~1811)의 배려였다. 그들의 간난(艱難)했던 시기를 도와준 은인이 바로 아암이었던 셈. 이때 보은산방에서 수행하던 9인의 산승(山僧)들에게 밤과 낮으로 ‘주역’과 ‘예기’를 강학했는데, 바로 ‘승암예문(僧菴禮問)’은 보은산방 승려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것이다.


한편 유산은 대둔사로 돌아가는 아암을 따라 황상과 함께 두륜산(頭輪山)을 유람한 뒤 ‘유두륜산기(遊頭輪山記)’를 남겼다. 따라서 다산 부자와 대둔사 승려들과의 폭 넓은 교유는 보은산방에서 시작되어, 후일 대둔사 승려들이 경향의 사대부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가교(架橋)였다. 특히 초의가 경화사족들과의 교유확대는 다산부자로부터 시작되어, 초의차의 애호층을 확대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운포 정학유(耘逋 丁學游, 1786~1855)는 유산의 아우이다. 초의와 깊은 정을 나누었는데, 1831년 석호정(石湖亭)에서 운포와 유산, 동번 이만용(東樊 李晩用, 1792~1863)이 초의와 함께 노닐며 지은 ‘유석호정여제부(遊石湖亭與諸賦)’에는 뜻 맞는 벗들의 아름다움 고회(高會)가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당시 운포는 문사들의 격조 높은 모임에서 차와 술이 그들의 흥취를 더했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난간 밖 푸른 물, 길고도 아득해(檻外悠悠綠水長)/ 사람들 서글퍼서 남쪽 산을 그립게 하네(令人?愴憶山陽)/ 무너진 담 이끼는 제멋대로 드문드문 나 있지만(壞薔苔色自無定)/ 깊은 숲 두견새 소리, 오히려 우는 곳을 알겠구나(深樹鳩鳴還有方)/ 술잔을 마주하고 차를 돌리는 일, 모두가 유쾌하고(對酒傳茶皆勝地)/ 낚싯대 드리운 채 물 따라 흘러간다(垂竿蕩任流光)/ 시 짓는데 몰두하여 오히려 나를 잊은 채 앉아 있고(微唫却作忘形坐) 숲 속의 창창한 해, 저녁 되자 서늘하네(林日蒼蒼到夕凉)


석호정은 양수리 근방에 있었던 정자인 듯하다. 넓디넓은 강물은 유장하게 흐른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각자가 지닌 회한(悔恨)과 즐거움이 동시에 일어난 것. 그래서 비창(悲愴)한 심사로 드러난 것이다. 석호정의 묵은 세월은 무너진 담과 이끼로 나타냈다. 술과 차는 이 모임의 정취를 한껏 부풀게 하는 장치. 문인들이 차를 즐긴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뜻 맞는 이들의 쾌활한 소통의 방편, 차의 생명성은 여기에서 빛난다. 또한 술은 정신을 혼미케 하지만 천지를 초개처럼 여기는 거침없는 용기는 술을 통해 얻는다. 극명한 가치를 지닌 차와 술은 사유하는 이들의 통쾌한 자유를 이끌어낸 매개체. 나(자신)를 잊은 채, 시 짓기에 몰두한 운포의 경계는 분명 시삼매(詩三昧)에 든 것이 분명하다. 한편 이들의 시회가 종일 이어졌음은 “창창했던 해가 저녁이 되니 서늘하다”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다. 차가 수행자의 참다운 벗임은 초의의 다른 시 속에 이렇게 드러난다.

 

 

▲정학유의 아들 정대무가 초의 스님에게 보낸 편지.

 


사람됨이 편벽하여 맑음을 좋아하니(爲人性癖愛淸休)/ 청산이 없었다면 어디에서 놀았을까(不有靑山底處遊)/ 깨끗하고 한적한 곳에선 먼저 발길이 멈춰지고(澹素幽閑先着脚)/ 사치하고 화려하면 돌아보기 싫어하네(繁華榮慕懶回頭)/ 깊고 깊은 산골 물은 (물)소리조차 아득한데(澗道深深泉響遠)/ 쇄~하는 물 끓는 소리, 차 연기 피어난다(松風細細茗烟浮)/ 온갖 인연 끊어진 밝은 창 안은(萬緣消盡明窓內)/ 화려한 궁전이나 누각도 비교될 수 없다네(玉殿朱樓未校尤)


이 시는 초의가 계묘(1843)년 신관호의 시에 화운한 ‘봉화우석신공견증(奉和于石申公見贈)’이다. 우석(于石)은 신관호(申觀浩, 1810~1884, 헌(櫶)으로 개명)의 호이다. 이때 그는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였다. 추사의 제자로, 초의의 탑비명(塔碑銘)을 지었던 인물. 초의의 선리논쟁에 참여하여 초의의 선론(禪論)을 옹호했다. 그 또한 초의차의 담박한 경지를 아는 인물이니 초의의 차 살림을 능히 짐작했으리라. 초의의 다삼매(茶三昧)는 밝은 햇살이 장지문을 통해 투영되는 맛, 이런 것이었다. 바로 추사가 초의차를 아꼈던 은밀한 뜻은 이런 세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초의에게 보낸 운포의 아들 정대무의 편지는 다산가와 초의의 오랜 인연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1860년 5월11일 초의에게 보낸 정대무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작년 겨울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살펴보셨는지요. 오늘 운곡이 와서 위로하시는(스님의 편지를) 읽고, 그 감동을 어떻게 감당할까요. 다만 자세히 살펴보니 쌓으신 도가 더욱 실해졌다니 그 노고를 위로하고, 축하드립니다. 저에게 불행하게도 백부가 돌아가셨으니 그 슬픔을 무슨 말로 다하며, 동량이 꺾인 집안을 어찌해야 할까요. 매번 슬픔이 일어날 때마다 마음은 스님이 계신 곳에 있지만 달려가서 향로지실에서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차는 해마다 세금처럼 보내시니 제가 고저에 차밭을 둔 것일까요. 차의 맑은 향기가 폐부로 스며듭니다. 이는 진귀한 것이니 감사드립니다.


천리 먼 곳에서 온 편지는 이미 그 성의가 지극하고, 스님이 보내신 (두강 차처럼) 좋은 차는 더욱 귀한 것이어서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 공덕을 보답할 수 있을까요. 해안은 어버이의 병으로 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소문을 들어도 슬퍼서 나를 위한 말임을 느끼지도 못하겠습니다. 도자기를 보내려하지만 날씨가 덥기 때문에 보낼 수가 없다더군요. 더욱 한탄스럽습니다. 모두 미루고, 가을에 다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정으로, 중국 먹(墨)을 보냅니다.(昨冬 敎律便付書矣入照否 今於雲谷來 卽讀慰狀 其感當何如 第審邇者 經履道腴 實慰勞祝 朞服人 家門不幸 伯父喪事 沈慟何言 而棟梁摧折 家其何爲 每於悲感之餘 思到南社 恨不鞋襪 以往說法聞偈 於香爐室中也 惠茶 歲輸其稅 我置顧諸田耶 其淸香沁脾 可是珍謝 千里致書 已極繾綣 而頭綱之惠 尤極僕僕 將以何答此功德耶 海眼以親癠不來云 聞來不覺悵然 爲我言及也 瓷器欲送 而以日熱之故 未能負去云 甚歎甚歎 都留 秋來可攄 不備謝狀唐墨一笏表情)

 

▲박동춘 소장

정대무의 백부는 유산이다. 유산이 유명을 달리한 것은 1859년이다. 따라서 그가 백부의 상중(喪中)에 편지를 보냈음이 확인되고, 대를 이은 차의 인연 또한 엿볼 수 있다. 특히 초의차의 맑은 향기가 폐까지 스민다는 정대무의 증언은 초의차의 품격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명증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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