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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백제의 불교

기자명 법보신문

신심 깊은 왕과 고승들이 활약했던 불교의 나라

법왕, 불교 통치이념 정립
왕흥사 창건 등 불사 시행

 

강한 국가불교 성격 특징
왕실에선 사리신앙 유행


 

 

▲왕흥사는 백제 왕실의 흥융을 기원하는 왕실의 중요한 원찰로 사비시대 백제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지난 2007년 이곳에서는 사리기를 비롯해 백제인들의 찬란한 예술혼이 담긴 8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져 큰 관심을 모았다. 사진은 왕흥사 목탑지 전경.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寺塔)이 매우 많다.”


이것은 ‘주서(周書)’의 기록이다. 이 기록과 같이, 백제에는 불교가 성했고, 당시 백제인의 생활은 불교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백제 불교사 기록은 너무 적다. 전하는 기록이 적을 뿐, 전하는 몇 가지 유물만으로도 백제 불교신앙의 깊이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장중한 미륵사 석탑, 평화로운 미소의 서산마애불, 그리고 남다른 조형미를 지닌 백제금동대향로 등이 그렇다.


백제에서는 국가에서 불교를 수용하고 국왕이 교를 내려 백성들이 받들어 믿도록 권장했다. 이 때문에 백제 불교는 국가 불교적 성격이 강했다. 법왕은 신심이 돈독하고 불교 진흥을 위해서 힘쓴 왕이었다. 그는 원년(599) 12월에 명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거두어서 놓아주고, 고기 잡는 도구와 사냥하는 도구를 불살랐다. 법왕은 2년(600)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기 시작했고, 승려 30명을 득도(得度)시켰다. 그리고 법왕은 이 해에 크게 가뭄이 들자 칠악사(漆岳寺)로 가서 비가 오기를 빌기도 하였다. 법왕은 즉위 2년 5월에 돌아갔는데 법왕(法王)이라는 시호를 통해서도 그의 불교적 통치이념을 엿볼 수 있다. 법왕의 숭불사업은 양나라 무제로부터 영향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법왕이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리고 민가의 사냥하는 도구까지 불사르게 했던 것은 무제의 ‘단주육문(斷酒肉文)’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무왕은 부왕(父王)인 법왕이 짓기 시작했던 왕흥사의 건설을 34년이나 계속하여 35년(634) 봄 2월에 드디어 완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7년의 왕흥사지 발굴조사에서 목탑지 심초석에서 명문이 새겨진 사리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 의하면 위덕왕이 577년에 죽은 두 왕자를 위해서 사리를 공양했다고 한다. 따라서 왕흥사는 법왕 2년 이전에 이미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흥사는 강가에 위치하였고,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하였다.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워진 이 절은 꽃나무가 수려하여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왕은 언제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와서 그 지형과 경치의 장엄하고 수려함을 구경했다. 사비수 언덕에는 10여명이 앉을만한 바위 하나가 있었다. 왕이 흥왕사에 가서 예를 드리려 할 때에는 먼저 이 바위에서 불상을 바라보며 절을 했는데, 그 바위는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돌석(突石)이라고 했다고 한다. 왕흥사는 백제 왕실의 흥융을 기원하는 왕실의 중요한 원찰이었다. 이 절은 현재의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구리에 있었는데, 이 절터에서 왕흥(王興) 2자가 양각된 기와가 발견되기도 했다.


무왕은 지금의 익산인 지모밀지(枳慕蜜地)에 제석사(帝釋寺)를 새롭게 조영했는데, 불당(佛堂)과 7층탑과 행랑을 갖춘 절이었다. 그리고 탑 아래의 초석(礎石)에는 7보(寶)와 수정병(水精甁) 중에 봉안한 불사리(佛舍利)와 목칠함(木漆函)에 봉안한 동판에 새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등을 보관해 두었다. 정관(貞觀) 13년 기해(639) 겨울 11월에 크게 천둥치고 비가 왔는데, 마침내 이 절은 화재를 입어 모두 타버렸다.


초석도 모두 다 타버렸지만, 오직 불사리병과 ‘금강반야경’을 담은 목칠함 만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불사리를 봉안했던 수정병의 내병(內甁)과 외병(外甁)은 변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리가 없었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이에 수정병을 가져다 대왕에게 드리자, 대왕은 법사를 청하여 곧 참회했다. 참회 후에 병을 열어보니 불사리 6과가 내병에 고스란히 있었고, 밖에서 보아도 6과가 모두 보였다고 한다. 대왕과 모든 궁중 사람들의 신심이 더욱 배가되었다. 이에 공양을 올리고 새로 절을 지어 사리를 봉안하도록 하였다.


없어졌던 사리가 참회 이후에 다시 나타났다는 이 기록은 사리의 신비한 영험이 강조되고 있지만, 이로 인해 국왕과 궁중 사람들의 신심이 더욱 배가되었다는 것이다. 중고기 신라 왕실의 사리신앙은 권력을 분명히 하는 상징으로서 왕실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전륜성왕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왕의 사리신앙도 왕실 권위의 상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절 이름 제석사를 통해서 당시 왕실에서 행해진 제석신앙도 알 수 있는데, 국왕과 제석을 직접 연결시켜 국왕의 권위를 신성시하는 지배 이데올로기 성립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기.
백제불교는 국가불교적 성격이 강해서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호암사(虎巖寺)의 정사암(政事巖)설화는 백제의 국가 불교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즉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에 뽑힐 후보 3~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호암사에 있는 정사암이라는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는데, 이 때문에 이 바위를 정사암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백제에서는 재상을 뽑는 중요한 일까지도 호암사 경내에 있는 정사암에서 진행했을 정도였으니, 호암사의 비중은 자연히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 일대가 호암사 경내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 절 경내에 있었던 천정대 터에서 백제와당이 수습되기도 했다고 한다.


백제 왕실과 연결된 절은 호암사 만이 아니었다. 오합사, 천왕사, 도양사, 백석사, 왕흥사 등의 여러 사찰도 국가 불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들 사찰에서는 여러 좋지 못한 조짐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즉 의자왕 15년(655) 여름 5월에 붉은 색의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 즉 오합사에 들어와 울면서 절을 돌기 수일 만에 죽었다고 한다. 또 현경(顯慶) 4년 기미(659, 의자왕 19)에 오회사(五會寺), 즉 오합사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주야로 여섯 시간이나 절을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의자왕 20년 5월에는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 두 절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고, 검은 구름이 용과 같이 공중에서 동과 서로 나뉘어 서로 싸웠으며, 6월에는 왕흥사의 여러 승려들 모두가 배의 돛과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사찰에서 일어난 이변을 좋지 못한 조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들 사찰의 국가 불교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오합사는 백제 오악(五岳)의 하나인 북악에 있던 절이다. 따라서 북악의 오합사는 국가적 진호(鎭護)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찰들은 백제 왕실의 원찰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위덕왕 36년(589) 이후에 귀국하여 활동한 현광(玄光)은 주목할 만한 고승이다. 현광은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종의 2조인 남악(南岳) 혜사(慧思, 514~577)로부터 ‘법화경’의 안락행품(安樂行品)을 중심으로 배웠다. 그리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하여 귀국했다. 그는 중국에서도 명성을 떨쳐서 중국 남악영당(南岳影堂) 내 28인도(圖)와 천태산 국청사 조사당(祖師堂)에도 모셔질 정도로 중국 불교사에서의 위치는 높고, 귀국 도중에는 용궁에 초청받아 설법했다는 설화가 전할만큼 유명했다. 귀국 이후 주로 위덕왕 때에 활동했던 현광은 주로 웅천(熊川)에서 교화했다. 현광의 중국에서의 활동과 귀국 연대와 관련해서는 ‘속고승전’ 중의 혜민(慧旻)의 전기가 도움이 된다.


혜민(573~649)은 15세가 되던 587년으로부터 약 2년 동안 회향사(廻向寺) 현광 문하에서 ‘성실론’을 배웠다. 따라서 현광은 589년(위덕왕 36)까지 중국에서 활동했고, 그 이후 어느 해에 백제로 귀국한 셈이다. 현광은 귀국 후 웅천 옹산(翁山)에서 교화를 펼쳤다. 현광의 제자들은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는 것으로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광에 의해 스승 혜사의 미륵신앙이 백제 사회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많다.

 

중국서 활약한 고승 다수
현광, 천태사상으로 명성

 

혜현은 법화경 독송 유명
백제에 법화신앙 등 전파


무왕 때의 고승으로는 혜현(慧顯, 569~627)이 유명하다. 그는 수덕사(修德寺)에 주석하면서 강론했는데, 먼 곳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 후 문득 남방의 달나산(達拏山)으로 옮겨갔다. ‘속고승전’에는 혜현의 전기를 다음과 같이 수록하였다.


혜현은 젊을 때 출가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한 곳에 모아 ‘법화경’을 외우는 일을 업으로 삼았기에 그가 복을 빌고 청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 그 후 삼론(三論)을 강의한다는 말을 듣고 곧 그에 따라 강의를 듣고 받아들였는데, 법이 일단 정신에 물들게 되자 더욱 그 실마리가 불어났다. 처음 본국의 북부에 있는 수덕사(修德寺)에 주석하면서 대중이 있으면 강론하고 없으면 곧 맑게 경을 외웠다. 사방 먼 곳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으로 산을 이루어 시끄럽게 접대하였다.


그 후 문득 남방의 달나산으로 갔는데 이 산은 매우 깊고 험하였으며 더욱이 견고한 바위들이 가로막아 비록 찾아가 전례(展禮)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올라가기가 어렵고 위태하였다. 혜현은 그 속에 고요히 앉아 예전과 같이 과업에 전념하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동학(同學)이 시신을 가마에 모시어 석굴 안에 안치하였는데 호랑이가 몸과 뼈는 다 먹고 오직 해골과 혀만 남겨 놓았다. 그 후 삼년이 지나니 그 혀는 빛깔이 더욱 적홍색(赤紅色)으로 변하였으며 보통 때보다 더욱 부드러웠으나 3년이 지난 후에는 자색(紫色)으로 변하여 딱딱하기가 돌과 같았다. 이에 도속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공경하고 함께 봉하여 석탑 문을 폐하였다. 혜현은 정관(貞觀) 초년인 627년(무왕 28)에 58세로 입적했다고 했으니, 그의 생몰년은 569~627년이고, 대체로 무왕 대에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상현 교수

그는 삼론을 강의하거나 ‘법화경’을 독송하는 일로 업을 삼았다고 한다. 그의 전기에는 ‘법화경’ 독송의 영험이 크게 강조되어 있는데, 이 영험담은 백제 사회에 ‘법화경’ 신앙을 전파하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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