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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에도 걸리지 않고 공에도 걸리지 않는 것이 중도

기자명 법보신문

여덟 가지의 잘못된 집착 없애는 방편이 얻을 것 없는 중도 참뜻 드러낸 팔불중도
언어로 세워진 임시 개념들을 다 초월해 생각 끊어진 경계 통달함이 불교의 종지

 

▲돈황 막고굴 45굴. 당나라

 

 

104. 중론의 팔불(八不)

 

論偈云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去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중론’ 게송에서 말하였다.

‘생(生)’도 아니요 ‘멸(滅)’도 아니며

‘상(常)’도 아니요 ‘단(斷)’도 아니다

‘일(一)’도 아니요 ‘이(異)’도 아니며

‘래(來)’도 아니요 ‘거(去)’도 아니다.

이런 팔불(八不) 인연들을 설하셨기에

이 세상의 온갖 희론을 없애 버리신

성스런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하오니

온갖 설법 가운데 최상의 설법이나이다.

 

今以因果 會釋八不義. 言不生者 如二十時爲因 三十時爲果. 若離二十 有今三十 可言有生 若離二十 則三十不可得 是故不生. 故中論云 離劫初穀 今穀不可得 是故不生.

 

이제 ‘인(因)’과 ‘과(果)’를 가지고 팔불(八不)의 뜻을 모아 풀이하겠다.

불생(不生)이란 스무 살 때를 ‘인’이라 하고 서른 살 때를 ‘과’라 하는 것과 같다. 스무 살이란 ‘인’을 떠나 지금 서른 살이란 ‘과’가 있다면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스무 살이란 ‘인’을 벗어나서 서른 살이란 ‘과’를 얻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불생(不生)이라 한다. 그러므로 ‘중론’에서는 “아주 옛날 맨 처음 곡식을 떠나 지금의 곡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생이다.”라고 하였다.

 

不滅者 則二十時不無 故不滅. 若二十時滅 今不應有三十時. 中論云 若滅 今應無穀 而實有穀 是故 不滅也.

 

불멸(不滅)이란 서른 살 ‘과’에 스무 살 ‘인’이 들어 있으므로 불멸이라 한 것이다. 스무 살 ‘인’이 없다면 지금 서른 살 ‘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론’에서는 “아주 옛날 맨 처음 곡식이 없었다면 지금 곡식도 없어야 하지만 엄연히 곡식이 있다. 그러므로 불멸이다.”라고 하였다.

 

不常者 則三十時 無二十時 是故 不常. 中論云 如穀芽時 種則變壞 是故 不常. 不斷者 因二十 有三十相續 是故 不斷. 中論云 如從穀有芽 是故不斷 若斷 不應相續.

 

불상(不常)이란 서른 살 ‘과’에 스무 살 ‘인’이 그대로 똑같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상이라 한 것이다. ‘중론’에서는 “곡식의 싹이 틀 때는 씨앗이 터지고 변한다. 그러므로 불상이다.”라고 하였다. 부단(不斷)이란 스무 살 ‘인’에서 서른 살 ‘과’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부단이라 한 것이다. ‘중론’에서는 “싹이 터서 곡식이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단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인과 과가 끊어진다면 싹이 곡식이 되는 인과(因果) 관계가 상속되지 않을 것이다.

 

不一者 二十不與三十同體 各性而住故 不一. 中論云 如穀不作芽 芽不作穀 是故 不一. 不異者 不離二十 有三十. 若二十姓張 三十不異. 中論云 若異 何故 分別穀芽穀莖穀葉. 是故 不異.

 

불일(不一)이란 스무 살 때 몸이 서른 살 때의 몸과 같지 않듯 변하면서 각기 다른 모습과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불일이라 한 것이다. ‘중론’에서는 “곡식은 싹이 아니고 싹은 곡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일이다.”라고 하였다. 불이(不異)란 스무 살 ‘인’을 벗어나지 않고 서른 살 ‘과’가 있으니, 이는 스무 살 성(姓)이 장(張)씨라면 서른 살 성(姓)도 장(張)씨로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중론’에서는 “만약 곡식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싹’ ‘줄기’ ‘잎’을 ‘곡식의 싹’ ‘곡식의 줄기’ ‘곡식의 잎’이라고 분별하는가. 그러므로 불이(不異)이다.”라고 하였다.

 

不來者 二十不至三十時 是故 不來. 不去者 二十時 當處自寂 不復更生故 不去也. 達此理者 則離一切戱論 契會中道 則眞諦矣.

 

불래(不來)란 스무 살 ‘인’이 서른 살 ‘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래라고 한 것이다. 불거(不去)란 스무 살 ‘인’이 그 자리서 본디 공적이어 다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거라고 한 것이다. 이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라면 온갖 희론을 떠나 중도와 하나가 되니 곧 진실한 진리이다.

 

강설) 팔불(八不) 중도의 이치이다. 색(色)에도 걸리지 않고 공(空)에도 걸리지 않아 법의 진실을 알고 자유자재한 부처님의 지혜를 우리는 ‘중도(中道)’라고 한다. 용수보살의 ‘중론’에 나오는 게송 가운데 불생(不生)·불멸(不滅)·불상(不常)·불단(不斷)·불일(不一)·불이(不異)·불래(不來)·불출(不出) 여덟 가지를 모아 팔불(八不)이라 하니, 여기서 불(不)자는 세속의 여덟 가지 잘못된 집착을 없애는 방편으로써 ‘얻을 것이 없는 중도’의 참다운 뜻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한다.

 

팔불(八不)의 의도는 모두 중생의 삿된 집착을 타파하는 데 있지만, 특히 그 가운데 앞의 불생(不生)·불멸(不滅)·불상(不常)·불단(不斷)·불일(不一)·불이(不異). 육불(六不)은 불생불멸의 뜻을 밝히고 있다. 이 불생불멸이 팔불의 근본이 되고, 여기서 또 불멸(不滅)은 불생(不生)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므로 불생이야말로 중도를 드러내는 ‘얻을 것이 없는 바른 사유[無得正觀]’의 근본이 된다.

 

또 ‘중관론소(中觀論疏)’ 2권 끝부분에 팔불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어리석은 범부, 성문, 연각, 외도, 독각과 초발심보살의 집착을 타파하고 있다. 곧 불생(不生)은 어리석은 범부들이 온갖 법은 반드시 존재로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다.

 

불멸(不滅)은 어리석은 범부들이 온갖 법은 다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다.

부단(不斷)은 단견을 가진 성문이 생사는 끊어져 없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다.

불상(不常)은 상견을 가진 성문이 도를 깨달음 몸이 무위열반에 영원히 상주할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다.

 

불일(不一)은 외도가 나와 내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다.

불이(不異)는 외도가 나와 내 몸과 마음이 각기 다르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다.

불래불거(不來不去)는 독각과 초발심보살이 인과에 집착하고 있음을 타파하여 삼계를 벗어나는 것이니, 오되 온 곳이 있고 가되 간 곳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 것이다. 그러니 이 팔불설(八不說)은 생멸 등 여덟 가지 잘못된 생각을 부정하여 ‘얻을 것이 없는 정관[無得正觀]’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니 성스런 중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105. 여래의 마음을 안다

 

諸佛單住眞如 名無垢識者 無垢淨識卽是常住眞心 爲復諸佛決定有心 決定無心. 據體則 言亡四句 意絶百非 約用則 唯智能明 非情所及. 華嚴經云 佛子 如來心意識俱不可得 但應 以智無量故 知如來心.

 

문: 모든 부처님께서 오로지 진여에 머무는 것 이를 일러 ‘번뇌 없는 앎[無垢識]’이라고 함은, ‘번뇌 없이 맑고 깨끗한 앎[無垢淨識]’ 그대로가 ‘상주진심(常住眞心)’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모든 부처님에게 마음이 분명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없는 것입니까?

 

답: 그 근본바탕에서 보자면 부처님의 마음이란 말이 끊어져 온갖 논리가 사라지고, 생각과 알음알이가 없어져 온갖 추론을 여읜 것이요, 쓰임새에서 보면 오직 부처님의 지혜로 밝힐 수 있을 뿐 중생의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화엄경’에서 “불자여, 여래의 마음은 중생의 알음알이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연에 응하는 지혜가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여래의 마음을 안다.”라고 하였다.

 

강설) ‘말이 끊어져 온갖 논리가 사라지고, 생각과 알음알이가 없어져 온갖 추론을 여읜 것’이라고 번역한 언망사구(言亡四句) 의절백비(意絶百非)는 부정의 논리로서 중생들이 갖고 있는 상대적 경계에 집착하는 삿된 소견을 없애고 얻을 수 없는 진공무상(眞空無相)의 이치를 설명할 때 쓰는 상용어이다. 사구(四句)는 유(有)·무(無)·역유역무(亦有亦無)·비유비무(非有非無) 네 가지를 말하고, 백비(百非)는 백 가지 부정이니 비유(非有)·비무(非無)·비유위(非有爲)·비무위(非無爲)·비유루(非有漏)·비무루(非無漏), 나아가 비과거(非過去)·비미래(非未來)·비현재(非現在)와 같이 온갖 것을 부정하는 논리를 말한다. ‘사구’와 ‘백비’는 온갖 논리와 추론의 바탕이 되는 언어로 세워진 임시 개념들을 부정하는 것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들 임시 개념들을 초월해 말이 사라지고 생각이 끊어진 경계를 통달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종지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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