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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죽음

기자명 법보신문

맞벌이 자식 위해 20년간 살림 도맡아
며느리 차가운 시선에 오랜 가슴앓이

며칠 전이었다. 오후 1시를 조금 넘겼을까. 김 할머니 딸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했다. 순간 할머니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정말 떠나시는구나 싶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뒀던 향로와 찻물을 들고 급히 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노모를 바라보는 중년 딸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물처럼 고여 있었다. 딸들의 비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 표정은 무심하리만치 편안해보였다. 나는 세 개의 향에 불을 붙였다. 향 연기가 곡예 부리듯 여기저기로 흩어져갔다. 향을 가만히 치켜들고 머리에서 발끝으로 천천히 이동해갔다. 그런 다음 부처님께 올렸던 찻물을 그 분 몸에 몇 차례 뿌려주었다. 번뇌도 미움도 다 내려놓고 향처럼 가볍고 찻물처럼 맑게 다음 세상과 인연 맺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누구의 삶인들 서러움이 없을까만 90년을 살아온 할머니에게는 더욱 그랬을 듯싶다. 열 가까운 많은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애태웠을 나날들. 일찌감치 남편을 떠나보내고 뼛속까지 쓸쓸했을 그 외로움은 또 어땠을까.


김 할머니가 우리 병원에 입원한 것은 지난 9월초였다. 세 명의 딸들은 마지막까지 엄마를 모시겠다고 했다. 딸들은 늙은 엄마에게 지극 정성이었다. 욕창이 생길까봐 수시로 안아주고 씻겨주었다.  또 불자였던 딸들은 틈틈이 법당에 들려 기도하고, 나를 찾아와 할머니의 지난했던 삶을 들려주기도 했다.


20여년 전 할머니는 셋째 아들내외와 살게 됐다고 한다. 맞벌이하는 셋째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바쁜 며느리를 대신해 빨래하고 살림하며 손녀와 손자를 키웠다. 그렇게 할머니 손끝에서 아이들은 부쩍부쩍 커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할머니 역할도 점점 작아져버렸다. 며느리 시선이 차갑게 느껴진 것도 그 때부터라도 한다. 간혹 할머니는 딸들에게 호소하기도 했지만 딸들은 애써 며느리를 옹호하고자 했다 한다. 딸들이 간섭하면 자칫 일이 더 커질 거라는 염려에서였다. 하지만 딸들은 엄마의 병이 그 때부터 깊어졌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할머니는 점점 야위어갔다. 밥은커녕 죽도 소화시키기 쉽지 않았다. 끔찍이도 아끼던 손자가 군대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위암말기로 판명됐다고 한다.


실제로 할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며느리들은 거의 병원을 찾지 않았다. 그나마 둘째 며느리가 병원을 자주 찾았지만 올 때면 목사님을 모셔와 할머니에게 기도할 것을 강요했다. 할머니가 평생 절에 다녔던 것을 잘 알면서도 하는 일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계신 병실에 자주 들렀다. 딸들이 원하기도 했지만 내가 손을 잡고 경전을 읽을 때면 할머니는 신기하리만치 행복한 미소를 보였다. 그것은 내가 할머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 동시에 할머니가 나로 하여금 새삼 출가자임을 깨닫도록 하는 성찰의 미소이기도 했다.


이제 할머니는 그 미소까지 뒤로 한 채로 떠나갔다. 딸들은 그나마 엄마가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에 대해 감사했다. 그러나 며느리들은 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임은 알까. 세상의 여인들은 누군가의 딸인 동시에 누군가의 며느리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늘 분별하고 괴로워한다. 그 분별은 상대는 물론 내 삶까지도 멍들게 한다. 자타(自他)가 불이(不二)라는 불변의 진리. 그것에 대한 깊은 자각이야말로 세상의 슬픔을 덜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대엽 스님 동국대병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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