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돈오(頓悟)
18. 돈오(頓悟)
  • 법보신문
  • 승인 2011.11.08 17: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념은 맑고 밝아서 망념이 전혀 없는 진여본성

여섯 감각기관 잘 제어하는 것이
수행의 근본이며 깨달음의 첩경

 

법에 집착하는 것은 또 다른 병통
‘번뇌가 보리’인 이치를 잘 살펴야

 

 

▲광효사는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도량으로 중국 최초의 보리수와 의발탑이 유적으로 남아있다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니라.(自性心地 以智惠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昧 卽是無念)


혜능 스님께서는 ‘단경’을 처음 설하실 때부터 무념(無念), 무주(無住) 무상(無相)을 기본으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무념(無念)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잘 관찰해서 안과 밖이 사무쳐 밝으면’이라는 뜻은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그대로 밖의 실천으로 이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무쳐 밝다’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지혜로써 관조된 마음에는 진여본성 그 자체로 맑음이 충만한데, 이것이 맑은 그대로 바깥의 실천으로 옮겨지는 때가 바로 사무쳐 밝은 때 입니다. 달리 말하면 안과 밖이 명철(明徹)해지는 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안과 밖이 명철해지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본래 마음이며 본성입니다. 탐냄, 성냄, 어리석음. 이런 마음은 본래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다. 밝은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는 먹구름과 같습니다. 상쾌한 바람에 먹구름이 사라지고 맑고 밝은 충만한 마음이 드러나면 곧 해탈입니다. 이것이 반야삼매입니다. 혜능 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무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념은 아무 생각이 없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무념이라는 말은 맑고 밝아서 삿되거나 잘못된 망념이 전혀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금 여섯 문으로 달려 나가게 하나 육진 속을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서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이라고 하느니라.(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從六門走出 於六塵中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莫百物不思 常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맑은 마음으로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집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섯 도적 때문인데, 여섯 도적은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을 말합니다. 바로 눈, 귀, 코, 입, 몸, 의식, 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입니다.


도적으로 표현된 여섯 가지 감각기관들은 각기 좋은 것만을 쫓아 바깥으로 달아납니다. 눈으로는 좋은 것만을 보려고 하고, 귀로는 좋은 것만 들으려 하고, 입으로는 좋은 것만을 먹으려 하고, 이렇게 잠시도 가만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안으로 맑아서 밖의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밖으로도 맑으면 이것이 바로 무념입니다. 어떤 소리에도 분노하지 않고, 어떤 칭찬에도 흔들리거나 들뜨지 않는 그런 고요하고 명징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섯 도적을 잘 제어해서 조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여기서 육진(六塵)은 육근의 여섯 가지 대상인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의식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말하는데, 이런 육진에 흔들리거나 물들지 않아야 항상 맑음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육진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은 상태가 바로 반야삼매이며 해탈자재이며 무념행입니다. 따라서 반야고 해탈이고 무념이고 간에 결국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들을 어떻게 잘 제어하느냐가 수행의 가장 큰 관건이 될 것입니다.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는 사람은 해탈삼매에 이른 사람이고 무념에 이른 사람입니다. 견성한 사람입니다. 스님들이 흔히 축원할 때 회향삼처실원만(回向三處悉圓滿)이라는 말을 합니다. 나의 공덕을 세 곳에 회향해서 모두가 다 완전해 지기를 발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세 곳이 어떤 곳일까요. 첫 번째는 중생회향(衆生回向)입니다. 가깝게는 이웃에 대한 회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덕이나 능력을 주변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게 가족이고 친구고 이웃이고, 국민이고 인류고, 뭇 생명들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리회향(菩提回向)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이 나를 맑히는 것으로 회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모든 행동이 복을 짓는 것으로 귀결되고 깨달음으로 향하는 것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복은 어떻게 짓는 것입니까. 복은 달라고 빈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지어야 합니다.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은행에 잔고가 없는데 카드를 마구 쓰다보면 빚쟁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이라는 잔고가 하나도 없는데 쓰기만 하면 신용불량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노동을 해서 돈을 벌듯이 복 또한 스스로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복을 짓기 위해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것을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내외가 명철해질 때 그것이 바로 반야삼매고 해탈삼매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맑음, 따뜻함, 자비, 사랑 같은 이런 마음들이 밖으로 실천되고 확산되는 것이 내외명철입니다.


그런데 나는 보시할 것이 없다거나 나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남을 바라보는 것,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 주는 것, 다른 사람을 칭찬해 기쁘게 해 주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보시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보리에 회향할 수 있게 됩니다. 깨달음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진여본성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또한 이뤄지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편안케 하고 윤택하게 합니다. 곧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제회향(實際回向)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신기루에 사로잡히지 않고 궁극적인 열반의 세계를 향해 회향하는 것을 실제회향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누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나누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누고 베풀고 끊임없이 선근공덕을 지어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향해가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흔히 무념이라고 하면 생각을 없애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법에 대한 집착이나 또는 어떤 것이 항상하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진다는 변견(邊見)에 빠진 것입니다. 다시 말에 법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집착하는 것만큼 법에 집착하는 것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진리 또한 뗏목의 비유와 같이 깨달음을 얻으며 버려야 합니다. 번뇌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지만 번뇌가 또한 보리인 이치를 잘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래야 법에 집착하는 병통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


부처를 이루거나 그 지위에 이르는 것도 결국은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의 감각기관을 어떻게 통제해 흔들림 없는 맑고 밝은 진여본성을 드러나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어디서 없던 것이 새롭게 생겨나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을 제어해서 맑고 밝고 자비롭고 투명한 마음이 그대로 삶에 구현되게 하는 것,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다른 말로 무념이 체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결국은 부처의 지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똑같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공능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육근을 제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과 생각을 잘 제어해서 안으로 맑아지고, 그 맑음이 밖으로 비춰, 안과 밖이 명철해지면무념이 구현되고 반야삼매가 체현되는 것입니다. 마치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깨달음이 이뤄지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절대로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살고 있는 이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면 특별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부처님입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보살피고 아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부처님입니다. 아주 특별한 것을 줘야 되거나 아주 특별한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혜능 스님의 말씀처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이고, 무념이며 반야삼매입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조금만 배려합시다. 그러면 마치 햇살에 방안이 환하게 물들 듯 우리 몸과 마음이 부처님의 성품으로 물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