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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처음 발심하는 법회 자리가 바로 뜻 이뤄지는 곳

기자명 법보신문

문수의 지혜가 온갖 보살행을 만드는 바탕
올바른 지혜 밑받침 없으면 마구니 종자 돼
보현은 자비로 중생에게 빠짐없이 이익 주며
보살행으로 부처님의 공덕 성취해 가는 보살

109. 선재 문수 보현

 

 

▲돈황 막고굴 69굴.

 


心垢則娑婆現相 心淨則華藏含空. 轉而起識輪 交羅而匪離心網 故海幢不起寂定 廣作十方佛事之門 善財不出道場 遍歷一百十城之法. 是以 文殊卽自心能證之妙慧. 善財至彌勒 一心佛果滿後 却令見文殊 因位將極 令返照心原. 更無有異 未始動念故. 再訪文殊 不見其身者 但了自心空般若故 是眞見文殊. 普賢是自心所證法界無盡妙行. 善財 雖遍法界 參諸善友 欲見普賢 不假別指 便於初會 始成之處.


번뇌가 있으면 사바세계 모습이 나타나고 마음이 맑으면 허공에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다. 육도에 윤회하면서도 언제나 알음알이를 일으키고, 중중무진 아름다운 꽃이 펼쳐지더라도 마음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니, 그러므로 해당 비구는 고요한 선정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널리 시방세계 부처님의 일을 하고, 선재는 수행터를 벗어나지 않고도 백열 군데의 성을 섭렵하며 법을 듣는다. 이로써 문수 역시 자기 마음에서 오묘한 지혜를 증득하였다고 한다. 선재가 미륵을 찾아가 ‘한마음에 부처님의 과보’를 오롯하게 얻은 뒤에 문수를 보게 된 것은, 불법의 수행이 아직 성불에 이르지 아니한 보살의 지위인 ‘인위(因位)’에서 바로 한 생각 돌이켜 비추어 보아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 다시 다른 법이 없어 애초에 한 생각도 움직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선재가 문수를 찾아갔을 때 문수의 몸을 보지 못한 것은, 오직 자기 마음이 공(空)이요 반야인 줄 깨달았기 때문이니, 이것이 참으로 문수를 본 것이다. 보현은 자신의 마음이 증득한 법계에서 끝이 없이 펼쳐지는 오묘한 만행을 상징한다. 선재가 두루 법계에서 선지식을 찾아 보현을 보려 함은 별다른 가르침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니, 문득 처음 발심하는 법회 자리가 바로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如來座前 而起念求 隨念卽見普賢在如來前 初無動移. 此正顯觀心卽見希奇之相 見聞證入 由睹前相 卽是見心故. 以普賢身相如虛空 遍一切處故 以普眼菩薩等 入百千三昧 求覓普賢 不見 只謂離念入定 厭境求眞. 不知塵塵是文殊 念念卽普賢故. 是以 善財一人 運悲智而橫廣十方 修願行而窮三際. 從初至後 因滿果圓 明顯一心 以爲樣.


여래 앞에 앉아 생각을 일으켜 찾으면 생각대로 곧 여래 앞에 앉은 채로 보현을 보니 처음부터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이는 ‘마음을 보는 것’이 곧 ‘기이하고 특이한 모습을 본다는 것’을 바로 드러내니, 보고 듣고 증득해 들어감이 앞에 있는 모습에서 보현을 봄으로 말미암아 곧 마음을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현의 모습은 허공처럼 모든 곳에 두루하다. 그러나 보안 보살 등이 온갖 삼매에 들어가 보현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찾지 못했다는 것은, 망념을 떠나 선정에 들어가려 하고 경계를 싫어하여 참다운 다른 어떤 것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이는 티끌마다 문수요 생각마다 보현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재 혼자 지혜로운 자비행으로 시방세계를 다니고 원력을 담은 보살행을 닦아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과가 오롯하니, 이 한마음을 수행의 본보기로 삼아야 함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강설) 선재동자는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수행자이다. 태어날 때 방안에 진귀한 보배로 가득 차 있었기에 ‘선재(善財)’라 이름하고, 동자는 수행의 단계로서 그 위치가 ‘동진위(童眞位)’를 뜻한다. 선재동자는 문수를 만나 도 닦을 마음을 내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53선지식을 차례로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다 맨 나중에 중생을 위한 보현의 ‘열 가지 큰 원력’을 듣고는 아미타불국토에 왕생하여 법계로 들어간다. 선재동자가 문수를 만나 발심하고 차례로 선지식을 친견한 것은 문수의 지혜를 갖추고 자비를 실천하는 보현의 길로 들어간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은 두 가지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종지를 밝히는 안목’과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의 안목’이다. 문수와 보현의 역할이 이것이다. 선종에서는 “혼자 자신의 공부만 알고 눈앞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외눈박이 불구자와 같다.”라고 하였다. 깨달음에만 집착하여 널리 보고 듣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선재동자가 처음 문수를 만나 마음이 트인 뒤에 두루 법계를 다니면서 다양하게 보고 듣고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수(文殊)’를 뜻으로 풀이하면 ‘묘수(妙首)’인데, 문수의 지혜가 헤아릴 수 없이 크므로 ‘묘(妙)’라 하고 그 지혜가 모든 지혜 가운데 으뜸이기에 ‘수(首)’라고 한 것이다. 문수의 지혜가 온갖 보살행을 만들어나가는 바탕이니, 보살행에 ‘한마음인 올바른 지혜’가 밑받침 되지 않는다면 이는 삿된 삶이 되어 마구니의 종자가 된다. 그러니 보살행 가운데는 반드시 ‘한마음인 지혜’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보현이다. 널리 베푸는 것을 ‘보(普)’라 하고 큰 덕을 ‘현(賢)’이라고 하니, 보현은 큰 자비로 모든 중생에게 빠짐없이 이익을 주며 온갖 보살행으로써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해 가는 보살이다.


110. 오묘한 이치를 담은 한 구절


法華經云 智者 可以譬喩得解. 今但取正解圓明 非論法說喩說. 若不悟道 徒執絶言. 今所言者 皆是提宗 唱道之言 極妙窮原之說. 如云萬句浮言 不及一句妙理 千般魚目 不及徑寸明珠. 夫一句妙理者 卽宗鏡之言也. 斯言 不可辯而自通 不可解而自釋. 所以云 善言不辯 辯言不善.


‘법화경’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만으로도 그 뜻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오롯하게 밝은 앎’만을 말하자면 법이나 비유로 설명하는 것을 논할 게 아니다. 도를 깨치지 못한 사람은 부질없이 말이 끊어진 자리에 집착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말로써 종지를 드러내어 도를 보여주는 것이니 지극히 오묘하게 근원에 통한 말이다. 이는 “온갖 현란한 논리와 헛된 말들이 ‘오묘한 이치를 담은 한 구절’의 뜻보다 못하고 천 개의 물고기 눈알이 직경 한 치의 밝은 구슬만 못하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오묘한 이치를 담은 한 구절’이란 ‘종경’을 말한다. 이 ‘종경’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것에 통해야 하는 것이요, 알음알이로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풀려서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말은 시비분별로 가려내는 말이 아니요, 시비분별로 가려내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114. ‘미혹의 무지’와 ‘반야의 무지’


聖心無有取相之知 故云 無知 非謂則無眞知也. 何者 般若靈鑒 無種不知 不同太虛 一向無知也. 然則 斷見無知 略明有十一種 論中略言三種. 十一種者 一者太虛 一向空故 二者木石 謂無情故 三者聾 謂根不具 無見聞故. 此上三種 是論所破. 四者愚癡 謂無智慧 於境不了故 五者癲狂 惡鬼惑心 失本性故 六者心亂 境多惑心 不能決斷故.七者悶絶 心神闇黑 如死人故 八者醉 爲藥所迷故 九者睡眠 神識困熟故 十者無想定 外道伏惑 心想不行故 十一者滅盡定 二乘住寂 心智止滅故. 此上是惑倒 非般若無知也.


성인의 마음은 어떤 모습을 취하여 아는 것이 없으므로 ‘무지(無知)’라고 하나, ‘참으로 아는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반야의 신령스런 성찰’은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할 게 없어 ‘전혀 아는 것이 없는 허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전혀 없다[無知]’는 단견을 대략 밝히면 열한 가지인데 논에서는 간단히 세 가지만 언급하고 있다. ‘무지(無知)’에 대한 열한 가지 잘못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허공 같은 무지이니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목석같은 무지이니 감정이나 알음알이가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귀머거리 눈먼 소경 같은 무지이니 온전한 육근을 갖추지 못해 보고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용수 보살의 ‘중론’에서 거론하여 타파한 것이다. 넷째는 어리석은 무지이니 지혜가 없기에 경계에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전도된 미치광이 무지이니 나쁜 귀신이 마음을 어지럽혀 본성을 잃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마음이 어지러운 무지이니 많은 경계가 마음을 어지럽혀 결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기절하여 아득한 무지이니 마음이 캄캄하여 죽은 사람 같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술이 취해 정신이 흐릿한 무지이니 술기운에 어리석어졌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잠을 자는 무지이니 정신이 곤하게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열째는 ‘아무 생각 없는 선정[無想定]’의 무지이니 외도들이 번뇌를 다스리기 위하여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열한 번째는 ‘모든 번뇌를 멸한 선정[滅盡定]’의 무지이니 이승(二乘)이 공적한 경계에만 머물러 지혜로운 마음도 멈춰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한 것은 모두 ‘전도된 미혹의 무지’이지 ‘반야의 무지’와는 다른 것이다.


강설) ‘미혹의 무지’는 어떤 경계에 집착하는 ‘중생의 앎’이고 ‘반야의 무지’는 부처님의 지혜로 집착 없이 모든 것을 아는 ‘부처님의 앎’이다. 이는 ‘오롯하게 밝은 앎’으로서 오묘한 이치를 담은 ‘부처님의 마음 종경’을 말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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