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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강수와 설총

기자명 법보신문

탁월한 문장력으로 대당외교·학문 발전 주도

강수, 불교 아닌 유교 선택
스승 찾아다니며 한학 공부
왕도 폭넓은 학문세계 찬사
신라의 외교 성공에 큰 기여

 

 

▲비록 7세기가 전쟁의 시대였음에도 무(武)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신라의 학문이 발전한 배경에는 뛰어난 문사였던 강수와 설총의 노력이 무엇보다 컸다. 왼쪽부터 강수와 설총의 영정.

 


7세기 후반 신라왕의 시호(諡號)에는 문(文)과 무(武)가 강조되었다. 즉 무열왕(武烈王), 문무왕(文武王), 신문왕(神文王) 등이 그 경우다. 백제를 공격하여 무너트리고 삼국통일의 단초를 열었던 무열왕의 경우는 무가 강조되었음에 비해 통일 직후의 신문왕은 문이 강조되었고, 통일을 왕성했던 문무왕은 문과 무가 동시에 강조되어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는 전쟁의 시대였기에 무가 강조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의 시대라도 무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없다. 외교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문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라고기’에 의하면, 강수(强首),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골답(骨沓) 등은 문장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김인문과 함께 숙위학생으로 당나라로 가서 공부했던 양도는 중국말을 잘했고 한문에도 능하여 여섯 번이나 당나라에 왕래했다. 병부령을 지낸 김진주(金眞珠)의 아들 풍훈은 숙위학생으로 당나라에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처형에 불만을 품은 그는 당나라 설인귀가 신라를 공격하던 문무왕 15년(675)에 향도가 되어 반역행위를 했던 인물이다. 신라의 대당외교 성공에 크게 기여한 문장가로 유명한 사람은 강수다.


강수는 매우 총명했다. 나이 들자 저절로 책을 읽을 줄 알아서 의리를 통달할 정도였다. 아버지 석체(昔諦)가 아들의 뜻을 알아보고자 하여 물어보았다.


“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유교를 배우겠느냐?”
이에 강수는 대답하였다.
“제가 듣자니 불교는 세속을 벗어난 종교인데, 저는 인간 세계의 사람으로서 어찌 부처가 하는 것을 배우겠습니까? 유교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대로 하라고 허락했다. 이 무렵 신라사회에는 불교가 크게 융성하고 있었지만, 강수는 유교를 공부하고자 했던 것이다. 강수는 스승을 찾아가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 등을 읽었다. 그리하여 당대에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태종대왕이 즉위(654년)하였을 때다. 당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였는데, 그 글 중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국왕은 강수를 불러서 물었다. 그가 왕의 면전에서 한 번 보고는 아무런 막힘도 없이 해석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왕이 이름을 묻자 그는 대답하였다.


“신은 본래 임나가양(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
왕이 말했다.
“그대의 두골을 보니 강수(强首)선생이라 불러야 하겠다.”
강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 뒤편에 뼈가 불쑥 나와 있어서 특이한 골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은 강수라고 했던 것이다. 무열왕은 그로 하여금 당나라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답서를 쓰게 하였다. 글이 잘 되고 뜻을 다 폈음으로 왕은 더욱 그를 특이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불렀다.
강수는 생계를 위해 힘쓰지 않아서 집이 가난했지만 언제나 즐거워하였다.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의 조(租) 100섬을 주게 하였다. 문무왕이 말하였다.
“강수는 문장을 잘 지어 능히 중국과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편지로 뜻을 다 전하였으므로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선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 하나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즉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강수에게 사찬의 관직을 주고 매년 200섬으로 봉록을 올려주었다.


강수는 일찍이 부곡(部曲)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野合)하여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다. 그런데 나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중매를 통하여 고을의 용모와 덕행이 있는 여자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강수는 사양하며 다시 장가들 수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이름난 사람이어서 나라 사람들이 모르는 이가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는 것은 수치스럽지 않은가?”
이 무렵 강수는 이미 여러 벼슬을 거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강수기 두 번 절하고 말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뜰아래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니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강수는 일찍이 사귀던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결혼했다. 강수는 신문왕(681~692) 때에 죽었다. 장사지내는 비용을 관에서 지급하였고, 옷가지와 물품을 더욱 많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를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바쳤다. 강수는 비록 유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아내는 장례비용을 불사에 바칠 정도로 불교에 귀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아내는 식량이 궁핍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대신이 이를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租) 100섬을 주게 하였더니 그 아내가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는데 지금 이미 홀로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듭 후한 하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끝내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수와 더불어 문장으로 이름났던 사람 중에는 설총이 있다.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성품이 총명하고 예민했다. 경서와 역사책에 두루 통달했던 설총은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분이고, 강수와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삼문장(三文章) 중의 한 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설총은 글을 잘 지었다고 하지만 전해오는 것이 거의 없다. 남쪽 지방에는 더러 설총이 지은 비명이 있다고 했으나 성덕왕 18년(719)에 지은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가 유일하게 전한다.

 

설총은 원효와 요석의 아들
경서와 역사책에 두루 통달
신라 향찰 체계화 및 집대성
‘화왕계’로 바른 정치 강조


‘삼국사기’에는 설총이 방언으로서 구경(九經)을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도 설총이 방음(方音)으로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통달하고 이회(理會)하여 육경(六經) 문학을 훈해(訓解)했다고 한다. 이는 설총이 그의 학문을 차자표기로 기록함으로서 그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던 것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하게 되었다. ‘대명률직해’에 설총이 지은 방언문자를 이두라고 한다고 하고,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설총이 이두를 지었다고 했으며,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에는 설총이 이두를 처음 만들었다고 했다. 이두란 광의의 개념으로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차자표기 전반을 의미한다. 따라서 설총이 향찰, 즉 이두를 창안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집대성하고 정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설총은 신문왕(681~691) 때에 벼슬했다. 어느 날 왕이 설총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청했다. 설총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옛날 화왕(花王)이 처음 전래하였을 때, 이를 향기로운 정원에 심고 비취색 장막을 둘러 보호함에 봄철 내내 고운 색깔을 발산하니 온갖 꽃을 능가하여 홀로 빼어났습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달려와 찾아뵙고 오직 자기가 뒤질까 걱정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났는데 붉은 얼굴에 옥 같이 하얀 이에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하늘거리며 와서 천천히 다가서며 말하였습니다.


“첩은 눈처럼 흰 모래를 밟고 거울처럼 맑은 바다를 대하면서 봄비에 목욕을 하여 때를 벗기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스스로 즐기는 장미인데,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또 한 장부가 있어 베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둘렀으며, 흰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노쇠하여 비틀거리며 굽은 허리로 걸어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성 밖의 큰길가에 살면서 아래로는 넓은 들 경치를 바라보고, 위로는 뾰족이 높다란 산에 기대어 사는 백두옹(白頭翁)이라 합니다. 생각하옵건대, 좌우에서 공급하는 것이 비록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옷장에 옷을 가득 저장하고 있더라도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을 만드는 삼이 있더라도 띠를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무릇 모든 군자는 어느 세대나 없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왕께서도 그러한 뜻이 없으신지요?”


그때 어느 사람이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왔는데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겠습니까?”
화왕이 말했습니다.
“장부의 말에도 합당한 것이 있으나 아름다운 사람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장부가 다가가 말하였습니다.
“저는 왕께서 총명하셔서 이치와 옳은 것을 알 것으로 생각하여서 왔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무릇 임금 된 자가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친근히 하고 정직한 사람을 멀리 하지 않음이 드뭅니다. 이런 까닭에 맹가(孟軻)가 불우하게 몸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낮은 낭중(郎中) 벼슬에 묶여 늙었습니다. 예부터 이러하니 저인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화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잘못 하였구나! 내가 잘못 했구나!”
이에 왕이 슬픈 얼굴빛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우화 속에는 실로 깊은 뜻이 있다. 청컨대, 이를 써서 임금 된 자의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


▲ 김상현 교수
이상의 우화(寓話)가 설총의 화왕계(花王戒)다. 우화를 통해 바른 도리로서 정치를 해야 함을 주장하고 부귀에 안주하고 요망한 무리들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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