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가불자들의 생활속 수행-上

기자명 법보신문

“아이들 훈육할 때도 그대는 자비로운가”

탐진치 정화하려 일상서 수행하면서도
자녀들이 실수 했을 땐 벌컥벌컥 화내

 

 

▲수미런던 법사는 일상에서도 자비로운 마음이 한결같아야 진정한 수행자라고 말을 한다. 사진은 수미런던 법사와 법사의 자녀들.

 


이것이 ‘법보신문’에 기고하는 나의 마지막 칼럼이라고 밝히게 되어 슬프다. 나는 지난 1년 반 동안 이 칼럼을 쓰는 것을 사랑해왔다. 동서양 불교 간 일종의 긴 대화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나에겐 크나큰 기쁨으로 다가왔던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 대화는 서로를 존중하게 만들었고 또한 서로 제시한 불법(Dharma) 홍포에 기여하는 방안 중에서 최상의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나에게 칼럼을 기고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법보신문’에 깊이 감사드리며 나의 글 쓰는 방식으로 인해 때때로 분명 곤혹스러워했을 번역자에게도 감사의 절을 올린다.


마지막 칼럼에서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나의 불교 수행법’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얼마나 많은 재가불자가 이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의 목소리는 아마도 더욱 작았을 것이다. 여기에 불교 수행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대한 한 가지 예를 제시한다.


엄마로서 나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없다면 아버지의 자녀 양육방식을 필시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통렬히 자각했다. 아버지는 유별나게 엄격했고 매우 모질게 말을 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랬던 것만큼 내가 나의 자녀에게 가혹했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한 달 전쯤 내가 미묘하게 나의 자녀들을 불필요하게 거칠게 대하지는 않았었나 의심하게 되었다. 테이블에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려 놓았을 때와 같은 사소한 일들에 대해 나는 자녀들에게 매우 강하게 짜증을 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한 번은 아들 녀석이 우유 컵에 걸려 넘어지자 공포에 질려 나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나의 자녀가 나를 두려워하면서 살게 만드는 것이 내가 진실로 원했던 것인가?


그 무렵, 나는 부엌에서 일하면서 유튜브(YouTube 미국 동영상 전문사이트, 역자 주)를 통해 태국에서 수계한 영국인 수행자 ‘아잔 브라흐마왐소’(Ajahn Brahmavamso)의 법문을 듣고 있었다. 명상수행 덕분에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매우 작은, 거의 감지하기 어려운 대화조차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아잔 브라흐마’(아잔 브라흐마왐소의 애칭, 역자 주)가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해결하거나 답을 제시하기 바로 직전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에 대해 예상하면서 미리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그런 관찰 자체만으로도 탐구해볼 만한 소재가 된다.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지?”


그러나 그것은 이번 칼럼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살아오면서 내가 완전히 틀렸던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예상한 답변은 ‘아잔 브라흐마’가 다음 순간 밝힌 것과 항상 정반대였다. 이것은 나의 자존심에 대한 결정적인 흠결이 되었다. 나는 항상 옳았으니까, 내가 어떻게 틀렸는가가 더욱 중요했다. 각각의 상황에 대해 그 답이나 해결책이 좀 더 예리하고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고 결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를 들면 한 때 ‘아잔 브라흐마’는 말했다.
“요즈음 결혼 서약이 어떤지 당신들은 알 것이다.…”


그러자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요즈음 사람들은 너무도 자기중심적이어서 필요하거나 배우자로부터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늘어놓을 거야.”
그러나 ‘아잔 브라흐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배우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서로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그것도 대중들 앞에서 그렇게 하게 되는 부부의 삶에서 매우 드문 시간이다. 공공연히 인식되어지는 또 다른 유일한 시간은 그들의 장례식 때일 뿐이다.”
그의 답변이 얼마나 완벽하게 내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편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혹함으로 향하고 있는 내 마음의 경향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런 사실을 그토록 명료하게 인식하고 나는 곧이어 생각했다.


“그런 나의 태도가 명상수행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가?”
명상 중에 일어나는 내면의 반응을 반추해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명상수련을 관찰해보았더니 과연 그것은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잡념에 사로잡혔다가 수식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었을 때마다 나는 나의 ‘마음챙김’에 성공한 순간에 대한 축하보다는 나 자신을 심하게 꾸짖곤 했다.


“너는 형편없는 명상수련가야. 너는 항상 그래왔어. 너는 결코 훌륭한 명상수련가가 되지 못할 거야. 얼마나 마음이 흐트러졌었는지 쳐다보아라.”


나를 꾸짖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결코 명상을 즐기지 못했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못 된다.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또 다른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깊이 내면화된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를 바꾸는 것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나는 전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었다. 우연히도 ‘아잔 브라흐마’의 책 ‘마음챙김, 법열 그리고 그 넘어로(Mindfulness, Bliss and Beyond)’의 한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은 명상수행 과정에서의 집중 및 ‘마음챙김’에 관련해서 발생하는 장애를 다루고 있었다. 그의 충고는 내가 이전에 배웠던 그 어떤 내용과도 달랐다. 대부분의 조언자들은 규율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졸음이란 장애에 부딪쳤을 때 참을 수 있는 만큼 숨을 멈춘다거나 잠이 덮치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다른 행위를 하는 등 다양한 ‘테크닉’을 제시한다. 졸음의 원인에 따라 다르지만 ‘아잔 브라흐마’는 단순히 선잠을 자게하고 그런 후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도록 하는 방식을 내놓기도 한다. ‘모독’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나 그는 책에서 명상에 있어서의 장애는 근본적으로 관계, 즉 명상 수행자와 호흡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면서. 모든 수행의 장애에 대해서 수행자와 장애 사이에 호의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것,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그 해결책이다.


“장애를 친절로, 관대함으로 대하라, 너의 마음과 전쟁을 하지 말고 화해하라.”
그 다음 몇 차례 명상수련에서 나는 ‘아잔 브라흐마’의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그 어떤 장애가 일어나더라도 마음 상태와 나 사이에 호의적인 관계를 맺도록 했다. ‘들뜸’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들뜸’과 평화롭게 지내보자, 이내 ‘혼침’이 일어났고 이번엔 졸림에 대해 다정해 보자며 기원했다. 그런 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수미런던 듀크 불교공동체 지도법사 simplysumi@gmail.com 
번역 백영일 위원 yipaik@wooribank.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