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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만파식적 설화

기자명 법보신문

신령한 용의 힘 빌려 불가침의 왕권 상징 의도

문무왕·김유신 명령으로
용이 임금에게 직접 전달


지배층에 의해 널리 유포
정치적 목적과 깊은 관련

 

 

▲ 신문왕은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만파식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만파식적 설화의 무대인 경주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  문화재청 제공

 

 

문무왕 16년(676) 11월 신라는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를 기벌포에서 격파하고 승리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오랜 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그래도 문무왕은 왜병을 대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짓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하고 681년 7월1일에 돌아갔다. 문무왕은 평소에 죽은 뒤에 한 마리 큰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불법 받들기를 염원했고, 죽은 후의 장례는 화장으로 할 것을 당부했었다. 태자는 선왕의 관 앞에서 즉위하고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남은 유해는 가루 내어 동해 푸른 바다 큰 바위에서 장례 모셨다.


신문왕은 즉위 2년(682)에 감은사를 완공했는데, 용이 절로 들어올 수 있게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신문왕이 감은사를 완공한 해인 682년 5월 초하루, 해관(海官) 파진찬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중에 있는 한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치게 했는데, 그가 아뢰었다.


“대왕의 아버지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三韓)을 진호하시고 또 김유신공도 삼십삼천(三十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키는 보배를 내어 주시려 하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그루의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感恩寺)로 가서 유숙했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해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두컴컴해지더니 7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용을 맞아 같이 앉으면서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성스러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값을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긴 전쟁 끝나고 평화 도래
신문왕 당면 과제는 화합


무열왕권 정당화 시키고
유민들 회유 목적도 한몫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이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이상은 만파식적 설화다. 만파식적은 신라 중대에 새롭게 등장한 국보였다. 신라 중고기에도 세 가지 보배가 있었다.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구층탑, 그리고 진평왕 천사옥대 등 신라삼보가 그것이다. 그런대 삼국통일을 이룩한 중대 초에 새로운 국보가 등장한 것이다.


카오스에로의 복귀와 그 뒤에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신화적인 순간을 보여주고 있는 이 설화는 전형적인 신화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갱신과 재생과 혹은 새로운 창조를 허용하기 위해서 혼돈이 따른다. 새로운 형태가 탄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상태를 끝내 버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지가 진동하고 풍우가 일어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고 하는 이 설화에서의, 천지진동은 세계의 완전한 파괴를, 어둠은 어떤 한계나 외형적인 윤곽이나 거리 등을 전혀 식별할 수 없는, 이른바 밤의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풍우는 모든 형태의 용해이고 무형에로의 복귀를 나타냄으로써, 이들은 모두 창조 이전의 카오스에로의 복귀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7일은 시간의 주기적인 재생을 의미한다. 7일간의 혼돈이 끝나고 신문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또 용이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7일 동안의 긴 혼돈이 끝난 후에 용이 등장했다. 신문왕 앞에 나타난 그 용은 문무왕의 화신이 아니라,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낸 사자용(使者龍)이었다. 그 사자용은 말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는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셨는데,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를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왕에게 바치게 한 것입니다.”


당시의 지배층에 의해 형성되거나 전승·유포되었을 이 설화에는 지배층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 설화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면서 이들 두 성인은 죽은 후에도 각각 해룡과 천신이 되어 국가를 수호한다고 한 것은 신문왕 당시의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지 않다.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두 성인이 마음을 합하여 무가(無價)의 큰 보배를 바치게 했다는 용의 말은 일관 김춘질이 했던 말과 같다. 그리고 일관의 말은 당시 신라왕실에서 두루 알리고 싶어 했던 이야기다. 결국 이 이야기는 당시 신문왕권의 정치적 목적을 일관과 용의 신성성을 빌려 불가침의 권위로 도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열왕권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고 왕권을 강화해 가는 신문왕대 초기에 등장한 만파식적은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상징하는 보물이었고, 동시에 호국적인 기능까지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신라삼보가 신라 중고기의 상징적 보물이었다면 만파식적은 중대 무열왕권을 상징하는 보물이었던 셈이다.


만파식적이 호국적인 기능을 갖고 있음은, 이것이 수성지보(守城之寶)로 강조되고, 또 이 피리를 불어 적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피리가 호국의 보배가 될 수 있었음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과 김유신의 위덕을 의탁한 신물(神物)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용이 신문왕에게 했던 이 말은 이 설화가 전해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이는 유교의 예악(禮樂)사상과 관련된다. 예악사상에 의하면, 성음(聲音)의 길은 치도(治道)와 통하고, 소리를 살펴 음을 알고, 음을 살펴 악을 알며, 악을 살펴 정치를 알고 예악을 모두 얻으면 덕이 있다고 한다고 한다.


대나무는 합한 후에 소리가 난다고 했다. 이는 다양성을 화합하는 음악의 공능을 설명하고 있다. 음악은 여러 다양한 소리를 조화시키고 화합시킨다. 높고 낮으며, 길고 짧으며, 강하고 약한 여러 소리들이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 그래서 음악은 조화고 평화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은 신문왕, 그의 과제는 조화와 화합이었다. 그것은 왕실과 귀족,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회유해야만 했던 통일 직후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감화시키고 풍속을 바꾸는데, 음악만큼 큰 것이 없다. 음악은 천지간의 화기(和氣)이고, 그 기능은 다양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만파식적설화에는 당시 신라인들의 음악관이 나타나고 있다. 신라사회에는 가법성행(歌法盛行)했다. 신라 청소년들의 집단인 화랑도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다. 그들이 추구하던 이념을 풍류도(風流道)라고 했다. 풍류도란 음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화랑도의 수행방법 중에는 상열가악(相悅歌樂)이 있었고, 상당수의 향가가 화랑도와 관련이 있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신라인들은 향가나 음악은 능히 천지귀신(天地鬼神)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이 갖고 있는 주술적이고 마력적인 힘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이 신적 현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그리스신화에는 신에 의해 발명되고 연주되며, 또 인간에게 전해졌다고 하는 많은 악기들의 이야기가 있다. 플루트·하모니카·기타 등은 그리스 신들이 애호한 악기였다. 이처럼 음악과 악기조차도 신들의 선물이라고 믿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신들에게 청원을 하고 신들을 달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였고, 신들이 그에 응답하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음악이 신적 현현이라고 하는 생각은 만파식적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해룡인 문무왕과 천신인 김유신이 보내준 선물이 곧 만파식적이었기 때문이다. 훗날에까지 만파식적이 신적(神笛)·신물(神物) 등으로 불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만파식적설화에서 대나무가 낮에는 분리하고 밤에는 합하며, 소리란 합한 후에 난다고 한 것은 악은 천지간의 조화라고 하는 예악사상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김상현 교수
천지간의 조화로 생겨난 만파식적의 소리는 자연히 덕음(德音)에 속하는 것이고, 따라서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는 그치며, 바람은 자고, 파도는 잔잔해지는 여러 신비적인 기능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천지가 조화를 얻은 상태의 표현인 것이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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