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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은 온갖 법 모인 곳, 세 가지로 나누면 계정혜

기자명 법보신문

상에 집착하면 상견, 무상 집착하면 단견
단견과 상견 함께 사라져야 한맛 나타나
법에 생멸 없고 결정된 성품도 없으므로
육도 윤회하는 것은 모두 마음에서 비롯

 

돈황 막고굴 196굴. 보살 당나라말기

 

 

116. 일심(一心)이란 온갖 법이 모인 곳

 

原夫立敎 皆爲對機 機宜不同 敎分多種. 且如觀色一法 五敎證入不同. 初小乘 見是實色 不說性空. 初敎 見此色法 從緣所成 必無自性 卽空無所有. 如波歸水. 終敎 見色空無. 以眞空不守自性 隨緣成色 卽是幻色. 遂賴空成 卽此賴空之色 虛相無體 自性盡而空現. 是故 色卽空而常泯 空卽色而常存. 要由自盡之色 方是空色 成色之空 乃是眞空 擧體互融 無有障說 如水入波. 頓敎 一色法無非眞理所收 是故 此色卽眞理一味等 更無別法而可顯說 如水波雙絶. 圓敎 起卽全收 一多互攝 同時成立 一塊圓明. 隨擧卽色 隨擧卽空 義味自在 隨智取用. 何以故 隨擧一門 無不顯現. 古德云 皆本一心而貫諸法.


부처님이 원래 저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의 근기에 맞추어 가르침을 펼치다보니 결국 많은 종류의 가르침이 있게 되었다. 이는 ‘색(色)’이란 하나의 법을 보는 입장에서 화엄종이 그 가르침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깨닫게 하는 방편과 내용을 달리하는 것과 같다.


처음 소승교(小乘敎)는, 실제로 ‘색(色)’이 존재한다고 보고 그 성품이 ‘공(空)’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둘째 대승초교(大乘初敎)는, 색(色)으로 드러나는 법은 인연이 모여 만들어져 반드시 ‘자신의 결정된 성품’이 없다고 보니, 곧 공(空)이어서 실체로서 존재할 것이 없다고 가르친다. 이는 파도의 모습이 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셋째 대승종교(大乘終敎)는, ‘색’과 ‘공’이 서로 걸림이 없다고 가르친다. ‘참다운 공’은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니 곧 ‘실재하지 않는 허깨비’와 같다. 결국 ‘공’에 의지하여 드러나니, 곧 ‘공’에 의지하여 드러난 ‘색’은 허상으로 어떤 실체가 없기에 항상 ‘색’으로 드러나는 인연이 다 흩어지면 ‘공’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색’ 자체가 ‘공’이어서 늘 없는 것이요, ‘공’ 자체가 ‘색’이어서 늘 존재한다. 요컨대 저절로 인연이 다 흩어지는 ‘색’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공’인 ‘색’이요, ‘색’으로 드러난 ‘공’이 ‘참다운 공’이니, 바탕 전체가 서로 원융하여 걸림 없음이 마치 물이 파도의 모습이 되는 것과 같다.


넷째 대승돈교(大乘頓敎)는, 하나의 ‘색으로 드러난 법’이 모두 진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음을 가르친다. 이 때문에 ‘색’ 자체가 진리와 한 맛이니 다시 다른 법으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물이나 파도로 나누는 분별이 다 끊어진 것과 같다.


다섯째 원교(圓敎)는, 한 생각이 일어난 그 자체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에 ‘일(一)’과 ‘다(多)’가 서로 거두어 동시에 있게 되니 하나로서 밝고 오롯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일어나는 현상계 전체가 ‘색’이 되기도 하고 ‘공’이 되기도 하니 이치를 음미하는 것이 자재하여 지혜롭게 그 쓰임새를 취한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를 들어도 온갖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은 “모두 본디 하나의 마음이니 온갖 법에 통한다.”라고 말한다.


夫一心者 萬法之總也. 分而爲戒定慧 開而爲六度 散而爲萬行. 萬行未嘗非一心 一心未嘗違萬行. 然則一心者 萬法之所生 而不屬於萬法. 得之者則 於法自在矣 見之者則 於敎無矣. 本非法 不可以法說 本非敎 不可以敎傳. 豈可以軌跡而尋哉. 故知 但硏精一法 內照分明 自然柔軟入神 順法界之性 無心合道 履一際之門. 華嚴私記云 無縛無著向者 只了一切皆如故 所以 無縛著耳. 知一切皆無縛脫 一法旣爾 一切法皆然. 所以 一切法卽一法 一法卽一切法.


무릇 일심(一心)이란 온갖 법이 모인 곳이다. 이를 세 가지로 나누면 계(戒), 정(定), 혜(慧)가 되고, 더 펼치면 육바라밀이 되며, 온갖 곳에서 갖가지 모습의 보살행으로 드러난다. 온갖 보살행이 일심 아닌 것이 없고 일심이 온갖 보살행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일심(一心)이란 온갖 법이 생겨나는 곳이면서 온갖 법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이치를 얻은 사람은 법에 자유자재하고 이런 이치를 보는 사람은 가르침에 걸림이 없다. 본디 법이 아니니 법으로 말할 수 없고 본디 가르침이 아니니 가르침으로 전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찌 짜인 틀과 자취로써 이 이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다만 하나의 법을 깊이 파고들면, 마음의 빛이 분명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신령한 곳에 들어가 법계의 성품에 따라가니, 분별없이 도와 하나 되어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이를 ‘화엄사기’에서는 “얽매이지 않고 집착함도 없이 회향하는 사람은, 다만 모든 것이 다 여여한 줄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 얽매일 것도 없고 집착할 것도 없다.”라고 한다. 모든 법에서 얽매일 것도 없고 벗어날 것도 없음을 아니, 하나의 법이 그러하고 온갖 법도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곧 하나의 법이요, 하나의 법이 곧 모든 법이다.


若一切法皆無性 卽是分身佛集 寶塔出現 須彌入芥耳. 如是洞達 一解千從 則知佛向無所有中出生 法於畢竟空中建立. 以無生無性 故轉由心. 遂得集散同時 大小卽入. 所以 森羅義趣 報化影像 乃至無量德業 廣大神通 於宗鏡中 一時顯現. 且如龍蜃等類 全是業果生死之身 尙現不思議之力用 何況悟根本心 具如實智 而不能現廣大之神用乎.


모든 법에 결정된 성품이 없다면 곧 분신불이 모여 보배의 탑에 출현하고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간다.
이처럼 통달하여 하나를 알면 천 가지를 이해하니, 곧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서 부처님이 출생하고 마지막 공에서 법이 생기는 것을 안다.


모든 법에 생멸이 없고 결정된 성품이 없으므로 육도에 윤회하는 것이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침내 모이고 흩어짐이 동시의 일이며 크고 작은 것이 서로 하나로 합하여진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의 갖가지 모양, 보신과 화신의 그림자, 무량공덕과 광대한 신통이 일심(一心)인 ‘종경(宗鏡)’에서 일시에 드러난다. 또 지난 삶의 과보로써 생사의 몸을 갖고 태어난 용과 이무기도 불가사의한 힘을 쓸 수 있으니, 하물며 근본 마음을 깨치고 실다운 지혜를 갖추었는데 어찌 커다란 신통묘용을 나타낼 수 없겠는가.


강설) 부처님이 사람의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설하다 보니 많은 종류의 가르침이 있게 되었다. 이를 세 가지로 나누면 계(戒), 정(定), 혜(慧)에 관한 것이 되고 더 펼치면 육바라밀이 되며 더 나아가 온갖 보살행이 된다. 이러한 가르침은 모두 부처님의 마음 ‘일심’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온갖 보살행이 일심 아닌 것이 없고 일심이 온갖 보살행을 벗어난 것이 없다. 이런 이치를 얻은 사람은 법에 자유자재하고 이런 이치를 보는 사람은 가르침에 걸림이 없다. 본문 ‘履一際之門’과 ‘華嚴私記云’ 중간에서 ‘종경록’ 원문에 들어있는 ‘所以 大智度論云 以人心多散 如狂如賊如醉 一心敬愼 是諸功德初門 攝心得禪便得實智慧 得實智慧便得解脫 得解脫便得盡苦 如是等事 皆從一心得’을 ‘명추회요’에서는 생략하고 있다.


117.생멸이 없는 이치를 바로 안다면


華嚴疏云 生之無生 眞性湛然 無生之生 業果宛然. 是知 若卽念存有念 卽是常見 離生求無生 卽是斷見 皆不達實相 無生無滅之理. 若正了無生 則無生無不生 豈定執有生無生之二見乎. 所以云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若以息念歸無念 如同寒木死灰 與木人何別. 豈有成佛之期耶. 斯乃尙未知卽念而無念 寧知一念頓圓乎.


‘화엄소’에서는 “생멸이 있는 곳에서 생멸이 없으니 ‘참성품’이 맑고 맑으며, 생멸이 없는 곳에서 생멸이 있으니 ‘삶의 과보’가 분명하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것에 그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상견’이요 생멸을 떠나 생멸이 없음을 구한다면 ‘단견’이니, 이는 모두 ‘실상의 생멸이 없는 이치’를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생멸이 없는 이치’를 바로 안다면, 곧 ‘생멸’도 없고 ‘생멸 아닐 것’도 없으니, 어찌 생멸이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에 집착하겠는가. 그러므로 영가 스님은 ‘증도가’에서 말한다.


‘무념’ ‘무생’ 집착하는 사람 누군가?
실로 ‘생멸’ 없다 하면 ‘불생멸’ 없네
나무 장승 불러다가 물어 보아라
그 공부로 조만간에 성불을 할까.


만약 생각을 그냥 쉼으로써 아무 생각이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마른 나무 토막이나 죽은 재와 같으니, 나무 인형과 무엇이 다르며 여기에서 어찌 성불할 수 있겠는가. 아직 생각 그대로가 ‘망념이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이니, 어찌 한 생각에 단박 ‘오롯하게 깨닫는 도리’를 알 수 있겠는가.


강설) 단견과 상견을 떠나 모든 집착이 없어져야 ‘생멸이 없는 이치’를 안다. ‘야부 스님 금강경’에서 말한다. “어떠한 모습이 있다는 ‘상(相)’에 집착한다면 상견이고, 어떠한 모습도 없다는 ‘상(相)’에 집착한다면 ‘단견’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있다’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혹 ‘어떤 모습이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상견’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 ‘어떤 모습도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단견’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기도 한다. 단견과 상견이 다르더라도 병이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병이 되는 것은 똑같으니 주먹을 펴 손바닥이 되는 것과 같다. 주먹을 펴 손바닥이 되니 어찌 한쪽이 반드시 옳다든가 그르다는 시비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단견과 상견이 함께 사라져야 바야흐로 한맛이 나타나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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