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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기

기자명 법보신문

“마음을 관하면 고통과 불안이 감소한다”

 

▲미국인 법사 언스트와 미국의 불자들이 그룹 담론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최근 한 친구가 페이스북에 “어머니의 추모주기를 기해 조언자이기도 한 그의 사랑하는 친구와 더불어 슬퍼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글을 올렸다. 즉각 댓글이 쏟아졌다. 댓글의 내용들은 ‘애정어린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몇 가지 예가 있다.


“너의 엄마는 지금 더 좋은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너의 엄마는 하늘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그 다음 글은 최초 게시자로부터 나왔다.
“나의 어머니가 이곳에 없기 때문에 내 딸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슬퍼.”
곧 이어진 댓글은 슬픔을 가라앉히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이었다.
“그녀는 너의 딸을 매일 지켜보고 있어. 네가 비록 보지는 못할 지라도 그녀는 너의 딸을 인도하고 있어.”
또 다시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 글을 썼다.
“여러 댓글 너무나 고마워.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 정말로 두렵기만 할 뿐이야.”
그런데 이에 대해 반응하는 댓글의 말투가 바뀌었다. 마지막 몇 개의 댓글에서는 그의 슬픔을 위로해 보려는 내용 자체가 사라졌다. 그 대신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상심에 가슴이 아프다. 참으로 견디기 힘들겠구나.”


아픔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슬픔에 대해서 정말로 함께 슬퍼하고 있었다. 댓글은 그의 경험으로부터 그가 벗어나도록 그를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 보기’가 그에게 정말로 의미 있었다고 그의 마지막 댓글은 주장하고 있다.


장기간 명상 수행을 해왔던 수행자들마저 심각한 상실 또는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 이를 누그러뜨리거나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을 보이곤 한다. 나는 그러한 시도를 종종 보았다. 종종 부정적인 면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망에서, 나쁜 소식이나 상실을 우리 자신 또는 타인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호의적인 결과를 상상하도록 하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상실감이나 슬픔에 끌려 다니게 된다. 슬픔에 잠긴 많은 사람들은 결코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또는 삶의 의미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 부정적인 가능성에 갇히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밝은 측면을 바라보면서 고통의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대하는 주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은 그렇게 작용하지 않고 때때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나는 지난해 몇 달 동안 준비해온 휴스턴에서의 ‘미술전시회’가 ‘허리케인 아이크’때문에 갑자기 취소되는 경험을 했다. 나는 이 전시회를 위해 수년 동안 멋진 박물관 거리의 ‘휴스턴 갤러리’를 들락거려 왔었는데 마침내 직접 출품을 하게 되었고 갤러리의 소유주와 직원들도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텍사스에서 많은 친구들이 전시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허리케인이 토요일 도시를 엄습할 것이라는 말을 전시회 개막 직전 들었다. 그 전시회는 1~2주 후로 연기되어 열릴 것이라는 게 나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옛 고통 잊어


그러나 폭풍이 지나가자 도시의 기반 시설을 복구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명확해졌다. 건물과 도로가 심각하게 파손되었고 전선 역시 엉망이 되었다. 전시회는 일정 조정이 불가능해 보였고 나는 이 일로 매우 상심했다. 이런 상황을 지인들에게 전하자 그들은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위로의 말을 내게 지속적으로 전했다. 예를 들자면 “전시회 일정은 몇 달 내에 잡히게 될 거야”, “이것은 우주가 너의 작품을 위해 더 큰 계획을 예정하고 있다는 증거야”라는 등.


나도 그들의 위로를 믿었고 그리하여 실망의 극단을 벗어나 그 동안 해왔던 일을 정당화시키는 긍정의 시나리오에 집착하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내가 쌓은 일종의 악업(惡業)으로 인해 허리케인과 만나는 불운한 때가 다가온 것이라고 간주하려는 ‘내적 경향’과도 나는 갈등했었다. 전시회가 취소된 후 며칠 동안 긍정적인 격려와 절망의 사념 속에서 내 마음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하지만 나의 명상수행 덕분에 나는 이런 내면의 갈등을 재빠르게 인지하고 그런 상태에 오랫동안 빠져있지 않을 수 있었다. 점차로 나의 반사적인 사유 패턴을 통해 나의 진면목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처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나는 이를 무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점차로 외로움에서 눈을 돌려 다른 구실을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게 되었다. 그 외로움을 충분히 경험하게 됨에 따라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사고는 멈추게 되었고 진면목에 대한 지혜가 확연히 드러났다. 대부분의 예술가처럼 나는 고독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내고 미술전시회는 그런 노력에 대한 공동체의 축하인 셈이 됐다. 허리케인 때문에 나의 노력의 절정인 공개적인 축하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쓸쓸했던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외로움을 인정하고 경험함으로써 자비의 마음으로 내려놓고 실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나는 경직되고 고정된 생각에 집착하지 않고 다가올 가능성에 대해 열린 자세가 될 수 있었다.


매 순간 우리의 경험에서 실재하는 것과 충돌하는 것들을 멈추었을 때 지혜와 통찰력이 발현된다. 상황이 어떠해야 한다는 우리의 관념과 배치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에 대처하는 우리의 ‘이야기’는 매우 교묘해져서 우리는 그것을 사변적 개념이고 ‘견해’라기 보다는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들이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감추어질 경우 그것을 놓아버릴 방법은 사라진다. 주기적으로 스스로에게 “지금 현재의 나의 경험 중 무엇이 진실일까”, “이 순간 나의 마음과 가슴 속의 진의는 무엇일까”라고 자문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지혜가 드러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된다. 휴스턴 전시회가 취소되고 나의 전시회는 일정을 다시 조정하지 못한 채 3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2008년 말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미술품 판매는 급감했고 아직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다.


마음관찰은 부정적 요인 약하게 해


하지만 뜻밖에도 내슈빌에서 내 작품을 전시할 두 번의 멋진 기회가 찾아왔다. 2009년 내슈빌 국제공항으로부터 대규모 전시회 개최를 요청받았다. 공항 당국은 멋진 환영회를 열어주었고 많은 친구와 수집가들이 와서 작품을 감상했다. 전시회가 끝난 직후 ‘밴더빌트 대학의료센터’에서 나의 작품을 그 센터의 로비 갤러리에 전시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 센터의 미술감독은 공항에 전시된 나의 작품을 감상한 뒤 센터의 대형 전시공간에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휴스턴에서의 전시 무산으로 인해 느꼈던 일체의 쓸쓸함과 실망감을 큰 환희와 감사로 대신할 만큼 마음이 흡족했다.

 

▲리사 언스트 법사
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병원 종사자들이 짧은 순간이나마 고요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나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보다 더 큰 만족감을 주는 일은 없다.
 

백영일 번역편집위원 yipaik@wooriba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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