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양목(黃楊木)은 나무 이름이다. 회양목과(―楊木科 Buxaceae)에 속하는 관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회양목’이라고 한다. 한국의 산지에서 많이 자라는데 특히 석회암지대의 산기슭과 산중턱에서 많이 자란다. 키는 작은 것은 50센티, 큰 것은 7m 정도. 상록수라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회양목(황양목)은 나무 재질이 매우 단단하고 견고하다. 도장(인장)을 새길 때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일명 ‘도장 나무’라고도 한다. 또 회양목으로 만든 호패를 황양목패(黃楊木牌)라고 하는데, 초시(初試)에 합격한 진사(進士)나 생원(生員)들이 차고 다녔다. 회양목의 용도(조각용도 등)가 매우 다양하여 공물(貢物)로 바치던 황양목계(黃楊木契)도 있었다.
나무 애기는 그만하고, ‘황양목선(黃楊木禪)’이란 근기와 자질이 매우 둔해서 오래 참구(공부)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황양목의 장점은 매우 단단한 대신, 단점은 자라는 속도가 아주 더뎌서 1년에 겨우 1촌(一寸, 약 3센티) 정도 자란다. 그런데 윤달이 든 해(閏年)는 도리어 1촌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빗대어 ‘진촌퇴척(進寸退尺, 한 촌 전진하고는 한 자=30센티 퇴보)’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자리에 정체되어 전혀 발전이 없는 사람, 또는 아무리 오래 선방에 앉아 참선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황양목선이라고 한다.
운허 스님 편 ‘불교사전’에는 “깨달은 곳에 주저앉아서 활용하는 솜씨가 없는 사람을 꾸짖는 말.” 그리고 ‘선학사전’에는 “수행에 정진하지 않아 퇴보한 선승(禪僧)을 가리킴”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모두 진취가 없는 선승을 가리킨다.
선어 가운데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100척(약 33미터)이나 되는 장대 끝(竿頭)에서 과감하게 한발 더 내 딛으라’는 뜻인데,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면 그 역시 자신을 구속하는 올가미,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내 딛었을 때(進一步)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법은 없다. 그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최고의 깨달음)라고 한다.”는 ‘금강경’의 법문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자든 학자든 정권(政權)이든 간에 현 위치에서 안주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특히 정신세계는 더욱 더하여 그 자리에 안주하면 정신이 썩고 타락해 버린다. 썩으면 정화 능력을 잃고 퇴보할 수밖에 없는데,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백척간두 진일보에 대하여 ‘깨달은 이후에는 다시 중생 속으로 내려와서(진일보)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십우도에서 맨 마지막 그림인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으로 내려와 손을 내 밀라)와 같은 뜻으로, 부처가 되었다면 그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다시 세속으로 들어와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것이다. 안주, 집착은 선의 핵심이자 목표인 공(空), 중도, 무집착의 세계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선사(1089∼1163)도 황양목선을 조롱했다. ‘대혜어록’ 17권 ‘보설’에, 단칠(斷七)이라는 시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여러 관원들과 함께 방장실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는데, 나는 손에 젓가락을 든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화두삼매). 그때 노화상(대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자는 황양목선을 하여 도리어 쭈그러들었군”이라고 하였다. 즉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일에 열중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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