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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옛사람들의 통신

잉어·소리개·비둘기 이용…혼령도 등장

견당사소식 기다리는 왕에게
죽은 신하 혼령 함께 나타나
당나라 백제 정벌 계획 알려

 

 

▲무월랑은 잉어를 통해 사랑했던 처녀의 소식을 전해들었고, 경주 선도산 성모 사서는 중국 황제인 아버지에게 소리개를 통해 연락을 취했다. 사진은 선도산 마애삼존불.

 

 

현대 문명의 여러 발전 중에서도 통신의 발전은 혁명적이라고 하겠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사람과의 통화는 물론이고 순식간에 많은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발전 아닌가. 옛날 사람들도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할 필요는 있었고, 이 때문에 어떻게 빨리 소식을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신라의 무열왕은 6년(659) 4월에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에 김인문(金仁問)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다. 신라 견당사가 남로(南路)를 통하여 장안을 왕래하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5개월 내지 6개월 정도였으니, 대개 10월경에는 견당사가 귀국할 수 있어야 했다. 10월이 되자 무열왕은 당나라의 회보를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당나라의 회보를 기다리고 있는 무열왕에게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의 혼령이 나타나 당의 백제 정벌 결정과 그 구체적인 일정까지 알려주었다는 설화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왕은 조정에 앉아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홀연히 그의 앞에 나타났는데, 앞서 죽은 신하 장춘과 파랑 같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했다.


“신은 비록 백골이 되었으나 아직도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어서 어제 당나라에 갔었는데,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치러 오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너무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립니다.”


말을 끝내자 사라졌다. 왕이 매우 놀랍고 이상하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에게 후하게 상을 주고, 해당 관청에 명하여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했다. 마치 현몽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무열왕은 이 무렵 당의 백제 정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나라에서는 659년 윤10월 29일 이전에 백제 정벌 계획을 확정했고,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해 당나라의 낙양에 도착한 일본사신 2명을 서경(西京)에 가두어 두기까지 했다. 신라의 무열왕도 10월경에는 당의 백제 공격 계획을 전해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장춘과 파랑의 혼령이 무열왕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는 설화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야 없다. 오직 사신이 돌아와 소식을 알려주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당시의 형편과 당나라의 회보를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무열왕의 모습은 상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고승은 도력(道力)을 활용해서 멀리 떨어진 곳에 소식을 전했다. 포산(包山)은 지금 현풍의 비슬산(琵瑟山)이다. 이 산에는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라는 두 승려가 조용히 수행하며 살고 있었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북쪽 굴에 몸을 의지해서 살았다. 서로 10여리나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할 때면, 산 속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하여 굽었는데, 그 모습이 꼭 영접하는 것 같았다. 관기는 이를 보고 도성에게로 갔다. 관기가 도성을 부르려 할 때도 또 이와 같이 하여 나무들이 모두 북쪽으로 굽었고, 도성은 곧 관기에게 이르렀다고 한다.


두 수행자의 도력은 나무와 소통할 수 있었고, 이로써 10여리나 멀리 있는 도반을 부르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산속의 수행자는 나무들과도 마음이 통할 정도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고, 이러한 믿음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오래 수행한 고승이야 도력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은 먼 곳에 어떻게 소식을 전했을까? 옛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새를 이용해서 멀리 소식을 전했다. 선도산 성모설화에는 소리개가 등장한다. 신라 왕경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이 있는데, 이 산의 신모(神母) 사소(娑蘇)는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우고 신라에 왔던 그는 오랫동안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 황제는 서신을 소리개 발에 매어 붙여 보냈다.

 

친인척과 소식 전하기 위해
인고 시간 견뎠던 옛사람들
핸드폰 사용 현대인은 도사


▲장승업 이어도(鯉魚圖).
“소리개가 머무는 곳을 따라 집을 삼아라.”


서신을 본 사소는 소리개를 놓아 보냈다. 소리개는 선도산으로 날아가서 멈추었다. 이에 사소는 거기 가서 살며 지선(地仙)이 되었고,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옛날에는 소리개 발에 서신을 매달아서 통신에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설화에는 비둘기가 등장한다. 주몽이 어머니와 이별할 때다. 어머니는 오곡의 종자를 싸서 아들에게 주었다.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했던 주몽은 그만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떠났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때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은 말했다.


“아마도 신모(神母)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이렇게 주몽은 두고 왔던 보리 종자를 비둘기를 통해서 전해 받았다고 한다.


비둘기가 통신용으로 이용된 것은 그 역사가 오래였다. 파사국(波斯國)에서는 배 위에 집비둘기를 길러 이것을 배 위에 싣고 다니다가 수천 리 밖에서 한 마리를 놓아 집으로 돌려보내서 편안하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이렇게 배에는 반드시 비둘기를 길렀는데, 만약 배가 침몰해도 귀소성이 강한 비둘기는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흰 비둘기[白]는 본래 천축(天竺)에 살았는데, 파사국(波斯國) 사람이 배에 싣고 신라에 가지고 왔고, 다시 이 비둘기는 일본에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평소에 집에 비둘기를 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예전에 배로 중국과 교통할 때에는 사신이 큰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등지에 도달하였는데, 거센 파도를 헤치고 가는 사행 길은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웠다. 조정의 신하로서 사명(使命)을 받은 사람은 집안사람들과 사별(死別)하는 것처럼 집안을 정리하고 떠났고, 대부분 집에서 기르던 집비둘기를 배안에 가져와 기르며 집에 서신을 전하곤 했다. 편지를 비둘기 발에 묶어서 날려 보내면 비록 천 리 먼 곳이라도 하루도 안 되어 도착하는지라, 집안사람들이 편지를 받고 안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 돌아와서 날짜를 헤아려 보면 하나도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이 생각한 통신술 중에는 잉어를 이용하여 편지를 전하는 방법이 있었다.


명주(溟州)의 유후관(留後官)으로 부임했던 무월랑(無月郞)은 연화봉(蓮花峰)에 올랐다가 한 처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임기가 끝나 무월랑은 계림으로 돌아가 반 년 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그 처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장차 북평(北坪) 집안 총각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여 이미 날까지 받아놓았다. 여자는 감히 부모에게 아뢰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몰래 걱정하다가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하루는 연못에 가서 옛날의 맹서를 생각하고, 기르던 연못 속의 황금 잉어에게 말했다.


“옛날에 잉어 한 쌍이 서신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너는 나로부터 양육을 받은 적이 많았으니 낭이 계신 곳에 나의 뜻을 전할 수 없겠느냐?”


그러자 갑자기 1자 반쯤 되는 황금 잉어가 못에서 튀어 올라와 입을 딱 벌리는데, 승낙 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이를 이상스럽게 여기고, 옷소매를 찢어 글을 썼다.


“저는 감히 혼약을 위배하지 않을 것이나, 부모님의 명령을 장차 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낭께서 만약 맹약을 버리지 않고 달려서 아무 날 까지 도착하시면 그대로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저는 마땅히 자살하여 낭을 따르겠습니다.”


이를 잉어의 입 속에 넣은 뒤에 큰 냇물에 던졌더니, 잉어는 유유히 사라졌다. 다음 날 새벽 무월랑은 관리를 알천(閼川)에 보내어 고기를 잡아오게 했다. 관리가 횟거리 생선을 찾다보니 금빛 나는 1자짜리 잉어가 갈대 사이에 있었다. 관리가 잉어를 붙잡아 낭에게 보였다. 잉어는 펄쩍 뛰면서 재빨리 움직여 마치 호소할 것이 있는 듯했고, 잠시 후 거품을 한 되쯤 토했다. 그 속에 흰 편지가 들어 있기에 이상히 여겨 읽어 보니 여자가 손수 쓴 것이었다. 낭은 즉시 그 편지와 잉어를 가지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크게 놀라면서 잉어를 궁중의 연못에 놓아주고 빨리 대신 한 사람에게 명하여 채색 비단을 갖추게 하고 낭과 함께 명주로 말을 달려가게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서 기약한 날짜에 도착하여 결혼할 수 있었다. 부인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곧 주원공(周元公)이고 차남은 경신공(敬信公)이었다.


이상은 연화부인설화다. 남녀의 이별과 재회를 줄거리로 하는 이 설화는 잉어가 전한 편지로 해서 재회가 가능하게 되었음이 강조되고 있다. 옛날 잉어 한 쌍이 서신을 전했다는 중국의 고사를 배경으로 당나라 사람들은 편지를 보낼 때 한 쌍의 잉어 형태로 접었고, 이 때문에 편지를 잉어라고도 했다고 한다.

 

▲김상현 교수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잉어에 의지하여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려 했던 옛 사람들 희망은 소박했다. 비둘기가 전해주는 소식은 얼마나 반갑고도 슬픈 것이었겠는가. 핸드폰을 들고 사는 현대들은 모두가 다 도사들인 셈이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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