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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잔자선(剗子禪)

기자명 윤창화

空 잘못알아 일없이 세월만 보내는 선승
선승의 밥 값은 본래면목을 제시하는 것

평소 ‘조사선·간화선·묵조선’ 이런 말은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잔자선(剗子禪)’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금시초문. 필자 역시 최근에 들었다.


‘잔자(剗子)’란 풀을 뽑거나 김을 맬 때 사용하는 호미를 가리킨다. 아주 작은 농기구로 그 능력은 삽이나 괭이에 못 미치지만, 흙을 굵어내는 등 섬세한 작업에는 아직 호미를 당할 농기구가 없다.


잔자선(剗子禪)이란 호미가 흙을 긁어내고 땅을 파내듯이, 모든 것을 파내고 깎아 내려서 일체를 허무로 보는 선(禪), 즉 일체를 공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일체개공으로 이해하는 것은 좋은데, 공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결과 허무, 허무주의에 빠져서 전혀 노력, 정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다 공한 것이야. 다 쓸데없는 것이야’하면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세월만 보내는 선승,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선승을 가리킨다. 철학적인 용어로는 니힐리즘(nihilism), 즉 허무주의가 잔자선이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낙공(落空, 공에 떨어지다)’ 또는 ‘공망(空亡, 공해서 없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공(空)의 논리 속에 수장(收藏), 매몰시켜 버리는 잘못 된 선을 가리킨다.


공(空)의 정의는 ‘나(我)’라고 하는 존재 즉 자기 자신을 공한 것으로 보는 아공(我空)과, 일체 사물, 즉 객관적인 것들도 모두 공으로 보는 법공(法空)이 있다. 이 두 가지를 합한 말이 일체개공인데, 초점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심리적인 현상을 공한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번뇌 망상과 분별심 등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지 말고 공한 것으로 보라는 것이다.


인식하고 있는 이 세계, 인식되고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마음 작용, 곧 생각(의식)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유심조이며, 착시현상, 또는 아지랑이 현상으로, 자성이 없는(無自性) 공한 것(空)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았을 때 비로소 집착하는 마음에서 해탈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혜 선사는 잔자선에 대해 묘심 거사에게 행한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서 항상 묵묵히 비춘다(黙照, 진리와 하나가 됨)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 원숭이(번뇌 망상) 목줄을 단단히 잡고서 그놈이(번뇌 망상) 날뛸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옛 선승들은 이것을 공망(空亡, 허무)에 떨어진 외도이며, 혼(魂)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살아 있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것).


진실로 마음의 생사(분별심)를 끊고 마음의 때를 씻고 번뇌 망상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원숭이(분별심, 중생심)를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야만 합니다. 만일 오로지 원숭이 목줄을 꽉 붙잡아 마음을 조복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집착이 정도를 지나친 것이니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정안(正眼)으로 본다면 이들은 모두 천마외도이고 망량(魍魎, 도깨비 즉 망념)이며 요정(妖精, 망상)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불교의 것들이 아닙니다’ (‘대혜어록’ 22권 示妙心居士)


▲윤창화
사실 우리나라에도 의외로 공에 매몰되어 있는 이들이 많다. 공의 진정한 뜻은 번뇌 망상을 비우라는 것인데, 100프로 오해하여 ‘아무것도 없는 공한 것(空亡, 허무주의)인데, 뭐 할 것(노력 등을 말함)이 있느냐? 다 부질 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빈둥빈둥 밥이나 축내면서 허송세월하는 이들이 많다. 불제자로서 사명감이나 역사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날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왔다갔다 놀기만 하는데, 밥값은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선승의 밥값은 본래면목을 제시하는 것이다.
 

윤창화 changhwa9@hanmail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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