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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내려놓는 순간이 곧 새로운 탄생

기자명 능행 스님

죽음을 돌본다는 건 또 다른 수행이다. 돌보는 이는 죽음을 바르게 자각하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한다. 자신의 죽음을 보살핌 받는 이는 자기잘못을 스스로 용서하며 내면의 행복을 일깨우고 사랑하게 한다. 말기위암으로 투병하던 환자도 죽음 앞에서 미움과 원망을 내려놨다. 그리고 미움, 원망 내려놓은 자리에 다시 사랑을 채웠다.


환자는 조용히 삶을 마감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마음속엔 남편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있었고, 시어머니도 미워했다. 꽃다운 열여덟. 환자가 결혼했던 나이다. 시골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과일 농사를 지으며 딸 둘과 아들 하나를 가졌다. 그렇게 15년, 위암을 알았고 암은 전신으로 퍼졌다. 죽음을 앞두자 암의 어두운 그림자는 환자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늦더위를 물릴 무렵, 정토마을 앞뜰 그네에서 환자와 마음을 나눴다.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요. 다 미워요. 꼴도 보기 싫어요. 자식은 제가 키울 수 없으니 보고 싶지 않고요. 남편과 시어머니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요.”
“보살님, 삶의 여정 중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었다면….”
“결혼 생활이요. 저는 결혼이 지옥이었어요.”


환자는 남편의 외도와 지나친 성 욕구에 지쳐있었다. 남편은 위암수술 뒤에도 부부관계를 요구했었다. 옆방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도 부담이었다고 토로했다. 둘째, 셋째 아들이 있음에도 병든 며느리의 밥상을 받고, 옆방에서 아들내외 관계를 알고 있는 시어머니가 지긋지긋했다고 했다. 그래서 홀로 있는 지금이 홀가분하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스님께 말할 수 있어서 홀가분해요. 너무 부끄럽고. 죽는 마당에 다 묻고 가자했는데, 말씀 드리고 나니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것 같아요.”


곧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온다고 했다. 환자도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깊어가는 가을, 사랑하며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스님은 사랑할 사람이 있어요. 보살님은 누구랑 사랑 할래요?”


“아이들…, 아이들이 있네요. 남편도 있고요. 사랑하면 제가 어떻게 죽어요. 막내는 아들을 바라는 시어머니 성화로 간신히 낳았어요. 예쁘고 좋은데 제가 키울 수 없잖아요. 그래서 막내를 데리고 오지 못하게 했어요. 자꾸 보면 제가 죽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환자는 죽음 앞에서 사랑이 소용없다고 좌절하고 있었다. 죽음이 사랑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알고 나서야 환히 웃었다.


“사랑이란 흐르는 강물 같아요. 지금부터 나누는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 가족들 삶을 촉촉이 적셔줄 거예요. 훗날 부처님 자비바다에서 가족과 만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정말 좋아요 스님. ‘강물 같은 사랑’이라…. 잘 모르지만 그냥 사랑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게 미워했는데…. 제 마음이 텅 비는 것 같아요. 이상하네요. 기분이 참 좋아요. 애들 아빠 요즘 배따느라 혼자 바쁠 거예요. 우리 남편 잘 생기고 성격도 좋아요. 막내도 한참 못 봤네요. 제 가슴이 따듯해져요 스님. 가을햇살이 좋아서 그런가?”


어미 개가 새끼들 몰고 발밑을 오갔다. 환자는 강아지를 만지며 “짐승이나 사람 새끼는 다 저렇게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중얼거렸다. 이후 4~5차례 만남에서 환자는 부처님께 의지했다. 항상 염주를 손에 들고 염불했다. 다음 생에서는 수행자 삶을 서원하면서.


▲능행 스님
가장 명확하고 가장 쉽게 두려워하는 우리의 관심은 죽음이다. 지금은 존재하지만 언젠가 존재하지 않는 게 우리다. 갈등은 죽음에 대한 자각과 계속 살고자 하는 바람 사이에서 일어난다.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지 않다.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잘 사는 법을 배우는 방편이다. 생물학적 죽음은 명료하나 심리적 삶과 죽음은 서로 맞닿아 있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다. 육신 껍데기를 벗는 순간,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도 죽는 걸까.


능행 스님 정토마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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