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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도 스투파 탑당은 왜 말굽형 평면인가?

석굴 구조 바꾼 불법 향한 대중의 신심

세계 최초 석굴은 원형
불란 앞의 예배=탑돌이
악기 연주와 절·공양도
좁은 입구 점차 넓어져 

 

무색의 종교, 불교의 최초 본격 숭배물은 탑 곧 스투파였다. 우리는 절의 전각을 금당, 법당, 불당으로 서로 섞어 부른다. 원 뜻을 보면, 가장 많이 쓰이는 ‘법당(法堂)’은 진리의 말씀 달마를 설법하는 곳이다. 따라서 부처님 모신 집은 ‘불당(佛堂)’이라 불러야 맞다. 오래 전에는 불상에 금칠했으므로 아니면 태국처럼 절집 자체에 금칠했으므로 ‘금당(金堂)’이라 불렀다. 현재 절의 전각 안에 모신 불상 앞에서 설법을 들으니 법당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른 말은 아니다. 인도에서 스투파를 모신 집을 ‘차이탸’라고 하고 번역하면 ‘탑당(塔堂)’이 된다. 굴을 팠으면 ‘탑당굴(塔堂窟)’이 된다.

 

 

▲1. 군투팔리 석굴 바깥 스투파 원형 탑당.

 


인도 탑 스투파는 원형인데 차이탸 탑당굴은 왜 앞서 본 바자, 카를리 석굴처럼 뒤가 둥근 긴 말굽 모양으로 되었을까? 산치 스투파에서 보듯 원형 스투파는 주위 탑돌이길 바깥으로 난간을 둘러 신성한 영역 표시를 하면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난간 대신 아예 벽체를 쌓아 원형 탑당을 만들게 된다(그림1).


9편에서 본 세계 최초 불교 석굴 군투팔리는 정확히 원형 굴이다. 비록 앞에 작은 사각형 전실 베란다가 있지만 말이다. 둥근 스투파 둘레 탑돌이길 외곽이 바위벽이므로 별도의 울 난간은 불필요했다. 전편에서 본 것처럼 실질 기능적 난간은 스투파의 상징적 난간장식으로 바뀐다.

 

 

▲ 2. 산치 스투파 탑문의 부조 예배 모습.

 


또 다른 스투파 의례 방식인 바로 앞 공간에서의 예배는 탑돌이 의례만큼 중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산치 스투파 탑문의 부조를 보면 스투파 바로 앞에서 절하는 중심인물과 더불어 각종 악기로 연주하는 여러 악사들과 합장하고 공양하는 사람들이 여럿 조각되어있다(그림2). 이처럼 실제 많은 인원이 예배 볼 수 있도록 군투팔리 석굴에서 본 좁은 출입구용 베란다 전실이 점차 넓은 홀로 확장되게 된다. 대도시 뭄바이 외곽 마하깔리 석굴이 그러하다. 뭄바이 공항 근처 도시 주거지 가운데 있는데 아주 힘들게 찾았다. 책에 나오는 콘디브테 석굴을 근처에 가서 물어보았으나 전혀 모른다고 했고 뭄바이에 있는 4개 석굴을 좍 꿰는데 결단코 그런 곳은 없단다. 암담하여 인근 칸헤리 석굴을 보고 나오면서 매표소에 물어보니 안드헤리 지역의 마하깔리 석굴을 찾으라고 알려주었다.

 

백여 년 전 영국인들이 왜 콘디브테라 이름 붙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잘 알다시피 독창적이기 보다는 번역 도입의 명수 일본인들의 번역판을 우리 학계에서는 그저 베끼기만 하여 다들 그리 알고 있다.

 

 

▲3. 마하깔리 석굴. 원형 스투파 방 밖에 넓은 홀.

 


나지막한 동산 앞뒤로 석굴이 여남은 개 밖에 안 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석굴군이다. B.C. 2세기경 추정 중심 탑당굴 전면은 이미 다 부서져 버려 원 모습은 알 수 없다. 스투파 방은 원형 오두막을 모방하여 굴을 판 것이 틀림없다. 초가지붕 처마 모양과 원형 곡면 벽체와 양쪽으로 격자 창살까지 재현해 파놓았다(그림3). 홀은 수십 명이 예배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다. 스투파 위는 돔 천정이지만 홀은 그냥 평평한 천정이다. 홀 측면 벽면의 불상 부조는 대승불교가 생긴 훨씬 나중에 새겨 넣은 것으로 본다. 만약 원형 스투파 방과 앞의 넓은 홀 사이에 곡면 벽을 터버린다면 그대로 인도 차이탸 석굴의 기본형인 뒤만 둥근 말굽형 평면이 된다.

 

 

▲ 4. 피탈코라 차이탸 10굴. 둥근  뒷벽.

 


유명한 관광지 엘로라 석굴에서 안으로 40여km쯤 더 들어 가면 잘 알려지지 않은 피탈코라 석굴이 있다. 가운데 깊은 협곡 양쪽 산의 두 석굴군 중 먼저 팠을 B.C. 2세기경 추정 북쪽 지역의 자그마한 차이탸 10굴이 그러하다(그림4). 부처님 알 불란(佛卵)을 모신 경사 원통형 대좌위에 난간 표시 장식이 있다. 스투파 뒤는 탑돌이를 위해 둥근 벽으로 팠다. 스투파 앞은 자그만 하지만 열 명 정도 예배가 가능한 공간이 된다. 석굴 정면은 원초적 인도 석굴 모습으로서 출입구 위 아치형 지붕 윤곽선에 채광창이 뚫려 있다(그림5).

 

 

▲5. 피탈코라 10굴 정면. 아치형 지붕 윤곽에 채광창.

 

 

깜깜한 석굴에서 위 채광창을 통하여 은은히 떨어지는 한줄기 신비스러운 빛은 불심을 북돋워 준다. 이후 인도 전역의 석굴에서 전면의 아치는 뾰족아치 장식으로, 채광창은 그에 맞춰 반원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반드시 파진다. 잘못 복원된 우리 석굴암의 현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라 선조들이 어리석게 깜깜한 석굴에 그대로 불상을 모셨을 리가 없다. 일제 때 채광창을 없애버린 막 복원을 그대로 이어받아 1960년대에 별 근거없이 목조 전실을 만들면서 자동적으로 채광창이 없어진 것으로 본다.

 

 

▲6. 정착된 노천의 말굽형 탑당. 나가르주나콘다. A.D.3세기경.

 


이후 인도 전역의 불교 사원에서 탑당은 말굽형 평면이 정형으로 정착되게 된다(그림6). 지금까지 얘기를 정리하면 인도 차이탸 탑당 석굴이 말굽형으로 굳어진 원인은 개인적 탑돌이 의례를 위한 원형 탑당을 다수의 회중들이 예배드릴 수 있도록 앞 공간을 넓혀 자연스럽게 말굽형 평면으로 정착되었다고 소박하게 해석할 수 있다(표1 위). 만약 그 중간단계에 과도기를 설정한다면 원형 탑당 앞의 좁던 전실 베란다가 넓은 예배 홀로 발전하고 나서 사이 벽을 터버리는 개념으로 말굽형이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표1 아래).

 

▲표1. 원형굴에서 말굽형굴로 변화 정착.

 

 

▲이희봉 교수
이후 인도 석굴 차이탸 탑당굴은 바자, 카를리 처럼 말굽형 내부 양 측면에 회랑을 형성하는 웅장한 기둥열이 발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석굴 전면 앞에 둘러싸인 앞뜰을 만들면서 더 많은 회중들의 집회 예배가 가능하도록 변화한다. 다음호에서 자세히 보도록 한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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