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자리이타의 길을 가기
47. 자리이타의 길을 가기
  • 법보신문
  • 승인 2012.07.24 17: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물질과 마음은 통섭되어서 함께 가는 것
우주·인간마음 존재방식 모두 자리이타

“근본을 얻을 뿐 끝을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우리가 보배스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도다.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여기서는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마지막 진리인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여실히 드러난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였으니, 해와 달 등을 비롯하여 모든 삼라만상이 생겨난 까닭은 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겠다. 해와 달도 다 마음이다. 그냥 무의미한 물질의 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 있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우주론적 마음의 철학은 부처님이 계시기 전까지 우리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서 나는 서양 근대의 합리주의철학자의 두 사람인 스피노자(Spinoza)와 라이브니츠(Leibniz)를 들려고 한다. 라이브니츠를 한국에서는 보통 라이프니츠라고 말한다. 그러나 리이브니츠라고 읽어야 한다. 둘 다 수학자이고 동시에 철학자이다. 스피노자는 신 아래에 영원한 두개의 실체인 사유하는 정신과 기하학적인 개념인 연장의 개념으로 환원되는 물질이 있어서 신의 우주가 나누어진다고 보았다. 신 속에서 정신과 물질이 서로 회통된다. 반면에 라이브니츠는 신이 창조한 이 우주는 단자(單子=Monad)라고 부르는 다원론을 전개하여, 어떤 단자는 정신적인 것이 우세하고 또 반대로 어떤 단자는 물질적인 것이 강하다고 여겼다. 물질과 정신의 차이는 스스로의 지각증세가 강하냐, 약하냐 하는 차이밖에 없다. 따라서 물질적 단자는 정신이 아직도 잠을 자고 몽롱한 상태에 놓여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신을 우리가 마음이라고 전제로 한다면, 정신과 물질은 마음의 두 측면이라도 불러도 되고, 또 라이브니츠의 경우처럼 서로 혼융되고 통섭된 두 측면이라고 봐도 괜찮겠다. 그렇다면, 정신은 물질의 비가시적인 욕망의 존재방식이고, 물질은 비가시적인 욕망의 존재방식의 가시적인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철학적인 생각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보기로 하자.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의 사상은 곧 생명의 진화사상과 맞먹는다.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은 마음의 생각을 다 반영하고 있다. 말은 천리도 화살처럼 빨리 달리고 싶은 마음의 표현으로 말의 몸이 그렇게 진화했고, 인간은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남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원력이 되어서 인간은 머리와 몸통이 그렇게 구분되었다. 그래서 입은 점차로 먹이사냥을 하는 앞으로 나온 뾰죽한 방향에서부터 말을 하려는 간절한 욕망이 현실화되면서 말을 하는 입으로 진화의 구조를 바꿔갔다. 바위와 같은 물질은 물과 같은 물질에 비하여 매우 정태적이고 안정적이다. 그래서 바위는 요지부동의 존재방식을 낳았고, 물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생명의 현상을 잉태케 했다.


마음은 바위고 물이고, 동시에 하늘이자 땅이기도 하다. 몸의 세포 속에 있는 무기질은 광물과 연관되기도 하고, 동시에 몸의 피는 그 물의 다른 모습이다. 광물을 떠난 마음이 무엇이며, 피를 모르는 마음의 욕망이 또 어디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물질의 힘을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과 마음은 서로 통섭되어 다 함께 간다. 유물론이 곧 유심론이고, 유심론이 바로 물활론이다.

 

▲김형효 교수
이 우주의 존재방식이나 인간 마음의 존재방식이나 다 자리이타(自利利他)다. 이것이 이 법계의 법칙이다. 우리는 도덕적 판단의 망상에 따라 정의를 너무 찾는다. 정의가 아니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조용히 찾아보기로 하자.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kihyhy@nate.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